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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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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새해 달력을 내건 지 벌써 열흘이 되었다. 흐르는 물처럼 매번 시간은 오고가고, 오늘 아침은 벽두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하루 동안의 마음을 지키는 수의(守意)나 새롭게 마음을 먹는 작심(作心)이나 주먹을 꼭 쥔 마음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새해 벽두에 어떻게 마음을 벼리었나. 맨 처음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지는 않았나. 오늘 아침은 문득 열흘 전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결심은 언제나 매서운 데가 있다. 눈보라를 몰아오는 찬 겨울바람처럼. 그러나 크게 마음을 먹는 일도 있지만 대체로 새해 벽두에 하는 나의 결심은 작고 조용한 변화를 위한 결심에 있다. 예를 들면 작은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심의 내용이었던 적도 있었다. 약속과 관련해서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는데,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를 말고 이미 한 약속에는 늦지 않는다는 결심도 있었다. 말과 관련해서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남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가로채지 않으며 남의 말을 하지도 않는다는 결심이었다.

특히 남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당부하신 것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남에 대해 뒷말 시비를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내게 앞의 두 개는 비교적 잘 지켜졌고 마지막 것은 아직 모자람이 있다.

올해 벽두에는 적은 종류의 반찬으로 적게 먹기로 마음을 먹었다. 살이 자꾸 붙어 등과 배가 불룩해지는 일도 걱정스러웠지만 식탐에 매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불교의 수행자들 가운데는 아침·저녁을 굶고 점심 한 끼만 먹는 일중식(日中食)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 많지만 내가 꼭 그런 수준으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고기나 생선을 입에 대지 않는 소찬(素餐)도 내 결심의 내용은 아니었다. 몸을 살리고 마음을 궁구한다는 큰 뜻도 없었다. 나는 다만 식탐으로부터 자재(自在)한 자리에 있고 싶어졌다.

그런 작정 이후 열흘째가 되었는데 잘 된 날도 있고 잘 되지 못한 날도 있었다. 해서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이 결심을 떠올려 결심에 결심을 얹는다. 그러나 나는 결심을 추구하되 물불 안 가리고 결심을 추구하는 축에는 끼지 못한다. 급하면 어그러지게 마련이고, 결심의 미덕은 결심의 이행을 좀 떨어진 자리에서 되돌아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아이들은 방학을 보내고 있다. 밤에는 일기를 쓰기도 하고 일일 생활계획표를 다시 그리기도 한다. 둥근 시계 모양으로 하루의 시간을 분할해 해야 할 일을 적어두는 것이다.

내 아이들도 나를 닮아 좀 무른 구석이 있는지 일일 생활계획표를 잘 그린다. 잘 그린다는 것은 자주 고쳐 그린다는 뜻이다. 일일 생활계획표를 수정한 아이들은 한껏 의기양양해서 “저, 마음 먹었어요”라고 말한다. 귀엽다. 새로 돋은 푸른 잎사귀 같다. 아이들은 그렇게 일일 생활계획표를 고쳐 그리는 일로 헌옷 같은 마음을 처분한다. 너절한 가구를 내치는 어른처럼.

마음은 늘 마음을 배반하고 등진다. 다른 데로 잘도 간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새해 벽두로부터 열 번째 아침을 맞고 있다. 요즘 서울 광화문을 지나면서 교보생명 빌딩 글판에 내걸린 시를 보게 되는데, 거기 인용된 구절은 본래 정현종 시인의 시집 『광휘의 속삭임』에 실린 ‘아침’에서 일부를 따온 것이다. ‘아침’의 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아침에는/운명 같은 건 없다/있는 건 오로지/새날/풋기운/운명은 혹시/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아침에는/운명 같은 건 없다.”

아침이라는 시간의 매장량을 알 수 없는 잠재력과 호기심과 창의력과 자발성. 새해의 결심으로부터 열흘을 살아 온 이 아침, 매번 결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침의 감각일지 모른다. 결심도 아침처럼 새롭게 살피고 일신(日新)할 때 궁극에는 지켜지는 까닭이다.

문태준 시인

◆약력:고려대 국문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사. 시인. 불교방송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