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세 노인이 90세 노인 봉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외로운 노인들끼리 도와가며 사는 거야.굳이 모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서울관악구봉천8동 이재환(李在桓.79)씨는 86년 관악산 유원지에서 우연히 만난 나종선(羅鍾善.90)할아버지를 12년째 봉양해오고 있다.3남6녀를 둔 羅할아버지는 살림이 어려운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큰아들집을 나와 노인정을 전전하던 터였다.李씨는 羅할아버지에게 선뜻“우리집에 오시라”고 청했다.

봉천동 쑥고개옆 13평짜리 집에 羅할아버지를 모신 李씨는 방 세칸중 두칸을 내주고 받는 월세로 빠듯하지만 오붓한 생활을 시작했다.“세상 살 맛이 없다고 푸념하고 있었는데 羅할아버지를 모시면서부터 사는 보람을 느꼈어.직장 때문에 경기도 안산으로 분가한 뒤에도 꼬박꼬박 용돈등을 챙겨주는 외아들과 며느리에게도 새삼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 날씨가 좋으면 오전8시쯤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탑골공원으로 향하고 궂은 날에는 각자 집안일을 맡아 바쁜 손길을 놀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동네사람들도 형제로 여길 정도였다.5년전 羅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집밖 거동을 못하게 되자 李씨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대소변을 받아내고 한달에 두번씩 중앙대 부설 사회복지관에서 약을 타오느라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됐다.

“처음 모실 때만 해도 자식들이 가끔 안부를 묻곤 했는데 지금은 전화 한통 안와.羅할아버지는'저희들 잘사는게 효도하는 거지'라고만 말씀하시지만….” 李씨는“마침 어버이날이 다가오니 카네이션을 사둬야겠다”며 6일 오후 집을 나섰다. 나현철.심재우 기자

<사진설명>

90세 노인을 12년째 모셔온 이재환씨가 6일 낮 산책에 앞서 중풍으로 고생하는 나종선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