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글로 감독 '스트레인지 데이즈' - 20세기말의 광기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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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세기말이자 1천년기의 마지막 날은 먼 미래가 아니다.불과 2년도 안남은 가까운 미래인 이때의 모습은 어떨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하드코어 스릴러로 정평나있는 여감독 캐서린 비글로에 따르면 20세기 마지막 나날들은 매우 암울하다.

99년 12월말 이틀동안의 로스앤젤레스를 보여주는'스트레인지 데이즈'(CIC)는 20세기말의 광기.증오.무정부주의.부패.인종편견등으로 점철된 잿빛 미래를 보여준다.

비글로의 남편이자'터미네이터2''트루 라이즈'등 대작전문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원안과 각색.제작을 맡아 작품구상 단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비글로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작품들의 특성을 가려 모은듯한 그녀 특유의 강렬함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흡혈인간들의 을씨년스런 세계를 다뤘던'죽음의 키스(Near Dark)',교활한 이상성격자와 신출내기 여자 경찰의 대결을 그린'블루 스틸',키아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의 멋진 액션이 인상적인 첩보물'폭풍속으로(Point Black)'등 그녀의 영화들은 시종 파워 가득한 폭력 묘사로 특징지워졌다.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비글로 감독의 이러한 장기가 세기말이라는 커다란 배경에 담겨 2시간25분동안 시청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면서 어두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폭력.건달세계에 깊이 연루돼 있는 전직 형사가 친구.애인등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이틀간 겪게 되는 사건들을 이야기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마구 나열하는 모습은 20세기 마지막날 다음 세기에 대한 꿈과 희망보다 지금까지의 인간문명이 근본적으로 사악했고 미래를 책임지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랄프 파인즈와'내추럴 본 킬러'로 천부적인 불량끼를 한껏 보여준 줄리엣 루이스등이 열연한다.이러한 어두운 미래상을 묘사하는데는'스퀴드(squid)'라고 불리는 뇌파신경 자극장치를 매개로 한 가상현실의 모습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이 겪은 과거를 다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스퀴드'는 주로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주고 범죄나 훔쳐보기등 부정적인 용도로만 이용돼 인간문명의 부도덕성을 상징한다.

영화 감상을 통한 휴식과 가벼운 재미는 찾아볼 수 없어 흥행에선 재미를 보지 못했던 이 영화는 종말론적인 인간 현실을 실제처럼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컬트영화로 분류될만한 작품이다.또 어마어마한 LA의 미래모습을 담은 무대장치와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LA다운타운에서 뛰쳐나와 21세기를 맞는 엄청난 모브신등으로 영화광들에겐 풍부한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카메론.비글로 부부는 틀에 박힌 듯한 선악 대결 구조와 어정쩡한 해피엔딩등 할리우드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해 역시 할리우드 제작 체계에서 자라난 영화작가임을 드러내고 있다. 채규진 기자

<사진설명>

자극적인 스릴러물로 정평이 나 있는 캐서린 비글로 감독의'스트레인지 데이즈'는 20세기의 마지막날 로스앤젤레스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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