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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家] 시인 조은의 사직동 14평 전셋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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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면

家를 연재한 지 어느덧 일년이 지났다.

지내놓고 보면 세월은 늘 너무 빨리 흐른다. 그간 집 취재를 다니면서 매번 환호하고 흥분했다. 그러나 정작 연재를 끝내면서 바로 이 집! 최상의 집!을 따로 발견해내지는 못한 기분이다.

'좋은 집'이 뭐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겠다.

값비싼 집, 독특한 집, 오래된 집, 천연재료의 집, 사연 많은 집을 찾아내봤지만 우리 삶이 그렇듯 집에도 정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각자 다 아름다웠고 각자 다 한계가 있었다.

맨 마지막에 오는 집은 어때야 할까를 한참 고민했다.

으리번쩍한 구경거리를 제공하고도 싶었고 세상 하나뿐인 개성을 보여주고도 싶었고 바로 내 곁, 평범한 이웃 집의 미덕을 재조명하고도 싶었다. 그리고 집에 관한 소박한 시를 한편 쓰고도 싶었다.

나는 결국 맨 나중 것을 택하기로 했다.

시인 조은의 집은 사직동 비탈진 골목 안에 있다. 사직공원과 경희궁의 중간쯤이다. 처음 그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두어해 전의 일이다. 그 집을 찾는 아무나, 벽에 머리를 기대기만 하면 스르르 잠이 들어버린다는 전설이었다. 소설가 신경숙도 거기서 솔솔 잠이 들었고 화가 김점선도 거기서 드렁드렁 잠이 들었고 신문기자 아무개도 못된 불면증을 접고 차 한잔을 끓여내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집은 또 생명력이 강해 바퀴벌레도 쥐만하고 어떤 일년생 식물은 지붕 꼭대기까지 자라며 모기들도 아파치 헬기처럼 강력하다고 했다. 그토록 생명력 강한 집이 사람에게도 나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올해 마흔 다섯이고 독신인 조은은 14년 전 부모님에게서 독립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머물 거처를 사직동으로 택했다. 좋아하는 인왕산이 가까이 있으며 주변에 도서관이 많고 밀집한 한옥들 사이로 난 깊고 좁은 골목들이 자신의 과거 한 부분을 석류처럼 익혀줄 듯했기 때문이다.

차가 못 들어가는 조붓한 골목 안 조은의 집은 대지 열네평의 한옥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13.75평이다. 그래도 거기 있을 건 다 있다. 실속있는 사람처럼 마당.거실.안방.건넌방에 변기 딸린 욕실을 갖췄고 창고에 다락까지 없는 게 없다. 그런데도 그다지 옹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창으론 어디서 걸러졌는지 달디 단 바람이 향긋하게 불어오고 햇볕은 벽에 아련한 무늬를 그리며 요람을 흔들 듯 조금씩 출렁댄다. 아닌 게 아니라 잠이 온다.

사진기자 권혁재와 나는 이야깃속같이 조은이 부엌에서 차를 내오기 전에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 평화로웠다. 고요했다. 그리고 먼지 한톨 없이 정갈했다. 가로 세로 1㎝짜리 30년 전 유행하던 분홍점박이 타일이 반질거리며 윤을 냈고 요즘 좀처럼 구경할 수 없던 갈색 페인트 칠한 나무 창틀 위로 흰 광목커튼이 겸허하게 펄럭거렸다.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왜 그렇게 기를 쓰는지가 갑자기 아득해졌다. 이만하면 족한 것을. 햇볕과 바람과 거기 펄럭이는 광목 커튼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을.

열 세평의 공간이면 평화를 얻는 것을. 대문 앞에 사람이 얼쩡거리더니 이웃에서 노란 배추 고갱이를 한 소쿠리 들고 왔다. 공터를 일궈 키운 남새라서 맛이 달 거란다. 입맛이 없다던 동행이 배추 한 소쿠리를 된장에 찍어 다 비워버렸다.

집은 정확지는 않아도 20세기 초에 지어졌을 거라 한다. 1910년이나 20년쯤. 가끔 벽에서 흙이 떨어져 들여다보면 옥수수 대궁에 짚을 이겨 바른 황토로 지은 걸 알 수 있다. 그래 그런가 여름엔 거짓말처럼 시원하고 겨울엔 방바닥이 믿을 수 없도록 따끈따끈해진다. 회칠한 천장엔 갈비뼈처럼 집의 서까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튼실한 소나무 갈비뼈다.

"거실에 누워 머리 위로 시선을 두고 있으면 내가 집이라는 생명체의 갈비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요. 때로 내가 집안 구석구석 피가 돌게 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염통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손맵고 바지런한 조은이 여기와서 살지 않았더라면 낡은 집은 이렇듯 생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 집에 세들고 나서 집주인이 전에 그 집 맞나하고 못 알아 볼 만큼 손을 많이도 봤다. 쓸고 닦는 것 말고도 스스로 시멘트를 개서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알뜰살뜰 광목을 호고(홈질하고) 누볐다. 나무로 짠 침상에 정결한 흰천을 덮어 가난하고 검소해서 고운, 수녀 같은 잠자리를 만들었다.

거실로 쓰는 공간이 전에는 마루였다. 양쪽에 자그만 방 하나씩을 거느린 세칸 집, 마당을 밟고 들어가는 낮은 부엌이 있는 전형적인 한옥을 그는 노는 공간이 1㎝도 없도록 콤팩트하게 요새화했다.

"얼마 전 크게 아프고 난 후에 알았어요. 아파트 같은 평면 공간보다 높낮이 있는 한옥이 건강에 좋다는 걸. 이 집은 좁긴 해도 사람의 근육을 은연중 단련시켜요. 아프고 났더니 높은 문턱을 도저히 넘지 못하겠더라고요."

이 동네는 지금 재개발을 기다린다. 덩치 큰 한옥들은 이미 다 허물어졌다. 검은 골기와 지붕이 촘촘한 동네는 곧 사라질 것이다. 눈길에 효율적으로 넘어지는 법을 익히게 했던 비탈길은 평평하게 골라질 것이고 고추와 상추들 사이로 과꽃과 봉숭아가 자라는 골목에는 번듯한 새집이 들어설 것이다. 집주인은 대개 강남에 살고 골목 안엔 거의 세입자들이다.

이마를 다닥다닥 맞대고 있으니 이웃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히 안다. 전세가 얼마? 물으니 조은은 시골에도 못가는 값이라 가르쳐줄 수 없다고 버틴다. 소설 쓰는 옆집 처녀가 조은의 책상 앞에 앉아 그의 예민한 개 또또를 어르면서 말한다. "또또야, 제발 우리 러키 사랑을 좀 받아줘라. 러키 피부가 얼마나 윤이 나고 예쁘니. 한번만 네 사랑을 허락해 줘라."

"내 시는 어두워서…" 하며 조은이 시집 한권을 건네준다. 왜 어두운 시를 쓰느냐고 물을 일이야 없다. 삶이란 깊이 응시할수록 어둡게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세상은 아랑곳없이 아름답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거기 올망졸망 사람사는 집이 있기 때문이고, 그 안에 곧 흙으로 돌아갈 제 목숨을 불꽃처럼 피워올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와 조은의 시를 읽었다.

"사람이 달라지는 데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psyche325@hanmail.net>
사진=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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