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똥깅이』가 꼭 필요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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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현기영(68)씨의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청소년 버전으로 출간됐다. 바로 『똥깅이』(실천문학사)다. 우선 분량이 대폭 줄었다. 원고지 1600여장 분량이었던 원작에서 무려 1000여장을 쳐냈다. 대신 삽화가 들어갔다. “초등 고학년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게 출판사 측 설명이다.

1999년 첫 출간된 『지상에 …』는 인간의 역사적 실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꼽힌다. 41년 제주 생인 작가가 4·3 사건과 6·25 전쟁이란 비극적인 현대사와 아름다운 제주도 풍광을 배경으로 자신의 성장사를 그려냈다. 상업적인 성공도 거뒀다. 지금까지 판매부수는 45만부에 달한다.

잘 나가는 『지상에 …』가 굳이 『똥깅이』란 새 옷을 입은 이유는 뭘까. 원래 성인용으로 나왔던 『지상에 …』는 청소년들에게 많이 읽혔다. ‘책따세(책으로따뜻한세상만드는교사들)’선정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도 올랐고, 각종 독후감 대회 대상도서가 되는 일도 잦았다. 최근엔 초등 5∼6학년까지 독자로 가세했다. 실천문학사 김영현 대표는 “ 『지상에 …』가 너무 두껍고 어렵다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줄여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많았다”고 말했다.

출판사로선 『지상에 …』를 청소년 소설로 자리굳히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법도 하다. 더욱이 요즘 출판시장에서 가장 뜨는 분야가 ‘영 어덜트’ 아닌가.

초등생 독자까지 염두에 두면서 『지상에 …』에서 가장 먼저 삭제된 부분은 4·3 사건이다. “4·3 사건은 어린 아이들의 여린 정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슬픔”이라는 작가의 판단에 따른 결단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등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빠졌다. 결과적으로 『똥깅이』는 밝은 이야기가 됐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천진하게 자라는 아이의 모습이 중심이 된 것이다.

『똥깅이』를 읽은 솔직한 심정은 아쉬움이다. 고전명작의 다이제스트를 보는 듯 싱거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지상에 …』에서 참혹한 현대사의 그늘이 짙었기 때문에 “무조건 자라는 것이 아이의 의무이므로, 아이는 결코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구절이 그토록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아닐까. 어른이 돼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주요 부분을 삭제하면서까지 아이들에게 서둘러 읽히려 하는 그 조급증이 안타깝다. 또 축약본으로 고전을 접한 아이들 상당수는 “이미 읽은 책”이라며 그 책의 원작을 읽지 않으려 한다. 『똥깅이』가 아이들에게서 『지상에 …』를 읽을 기회를 빼앗는 역효과를 빚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우리 출판계의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다. 장사 되는 청소년물에 너도나도 ‘숟가락 하나’ 얹으려는 풍조. 2000년대 초반 유아책 시장에서 한바탕 지나간 바람이 아니던가. 결국 ‘포화상태’가 돼서야 멈춘 그 바람을 다시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것이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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