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처지 시각장애인 위해 길잡이 휴대전화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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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만이 안내견 험벨과 포즈를 취했다. [라만 홈페이지]

세계 최대 검색엔진인 구글의 연구원인 T V 라만(43·사진)은 주머니에서 터치 스크린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가 화면의 자판을 누르자 “파이브(5)”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5를 기준으로 앞뒤 옆으로 화면을 눌러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화면을 누를 때마다 숫자를 알려주는 음성이 나왔다. 실수로 다른 번호를 눌렀을 때는 휴대전화를 흔들어 번호를 삭제했다.

라만이 음성이 나오는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이유는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 과학자인 그는 같은 처지의 시각장애인이 편리하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이 같은 소프트웨어를 손수 개발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라만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래형 휴대전화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4일 보도했다.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인터넷 연결이 되는 첨단 단말기)에 음성인식과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기술을 결합, 시각장애인이 목적지를 입력하면 자세하게 길을 안내하는 소프트웨어다. 예로 “지금까지의 보폭으로 200걸음 직진하면 사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입니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는 휴대전화에 장착된 카메라로 사물을 식별해 알려주고 문자를 읽어주는 기술도 연구하고 있다. 이 기술은 시각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운전할 때 휴대전화에 장착된 카메라로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지 않는 도로 표지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NYT에 “휴대전화는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이 일에 몰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인도 출신인 라만은 14세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와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시각장애인이 된 뒤에도 책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형은 앞을 못 보는 동생을 위해 책과 학교의 각종 과제물을 읽어줬다. 동생이 등·하교하거나 도서관을 찾을 때 곁을 지켰다.

형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 덕분에 라만은 미국 명문 코넬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자문서를 음성화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룬 그의 박사 논문은 미국 컴퓨터공학협회(ACM)의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라만은 졸업 뒤 소프트웨어 회사인 아도비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PDF 파일을 음성화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는 PDF 파일의 세계 표준 중 하나가 됐다. 2005년 구글로 옮긴 뒤에는 구글의 검색엔진을 시각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의 기술을 활용해 만든 시각장애인용 구글 사이트(labs.google.com/accessible)는 검색 결과를 음성으로 쉽게 읽힐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기술 덕분에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분기에 7억 달러에 이르는 큰 이익을 냈던 구글이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시각 장애인용 프로그램에 투자한 덕분이었다.

라만의 책상 위에는 모니터가 있지만 꺼져 있는 경우가 많다. 모니터를 켜지 않고 음성화된 파일로만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의 곁은 시각장애인 안내견 험벨이 11년째 지키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옆을 지켜준 험벨을 위해 자신의 홈 페이지에 코너(emacspeak.sourceforge.net/raman/hubbell-labrador)도 만들었다.

라만은 점자를 익히기 위해 점자 루빅 큐브(정육면체 퍼즐)를 배웠다. 그가 루빅 큐브를 23초 만에 푸는 모습은 동영상 웹사이트 유투브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4180435763269825467)에 올라 있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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