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벌>18. 라모스家 - 잇단 쿠데타 막아 비민주화 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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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모든 필리핀인이 각자 완성된 개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은 부국강병책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국민자치'능력을 키우도록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 피델 라모스(69) 필리핀 대통령의 평소 신념이자 소신이다.

41년간 군대에 몸담았던 군인 출신 정치가로서는 매우 유연한 사고를 가진 셈이다.라모스 대통령이 이처럼 유연한 사고를 갖게 된 것은 청년 시절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식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또 이는 그 자신

이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라모스 대통령은 청년장교 시절 한국의 6.25전쟁에 참전했고,이후 필리핀 공산반군과의 전투,베트남전등에도 참전했다.

라모스 대통령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 북쪽 린가옌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나르시소 라모스는 법률가.언론인 출신으로 5선의원이며 외무부장관(65~68년)도 지낸 유력한 정치가였다.

어머니 안젤라 라모스는 일로코스 노르테 지방의 명문 발데스 가문 출신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웅변술이 뛰어나 남편의 정치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청년 시절 라모스의 꿈은 토목기사가 되는 것이었다.그가 필리핀 국립공대 재학시절 미국 육사의 공학과정에 지원한 것도 그런 꿈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미 육사 졸업후 일리노이 대학에서 토목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필리핀에 돌아와 토목

기사가 되기를 원했다.그러나 공산반군의 출현,한국전쟁,베트남전쟁등은 토목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라모스를 쉴새 없이 전쟁터로 내몰았다.

마르코스 전대통령의 사촌이기도 한 그는 군인으로서 순탄하게 승진해 나갔다.마르코스가 계엄령을 펴고 철권통치를 했던 72~81년에는 치안 총책임자를 맡아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를 체포하기도 했다.이 때문에 그는 많은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라모스는 86년 군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의 남편인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 살해혐의로 파비안 베르 당시 참모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였다.

라모스의 누이동생이자 정치가인 레티시아는 당시 아키노 지지를 선언하며

마르코스 진영에 계속 남아있는 오빠를 비난했다.전직 외교관 출신의

레티시아는 현재 상원의원으로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라모스는“내가 참모총장 자리를 물러날 경우 군이 어떻게 동요할지 모르며

10만명이 넘는 군 장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심경으로

자리를 지켰노라고 후에 회고한 바 있다.

그러다 라모스는 결국 마르코스 축출에 가담한다.86년 코라손 아키노와

경선해 선거 부정으로 재당선된 마르코스를 축출하기 위해 당시 엔릴레

국방장관이 주도한 마르코스 축출 쿠데타에 라모스 당시 참모총장은

동의했다.

그후 엔릴레는 실패로 끝난 아키노 축출 쿠데타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밀려나고 라모스는 88년1월 국방장관에 올랐다.그는 코라손 대통령 통치

시절 일곱번의 쿠데타를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결국 코라손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92년 대통령에 올랐다. 대통령에 당선된 라모스는 경제 성장과 공산반군 무력화에

역점을 두었다.공산당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제시하고 공산반군 지도자와

협의하는등 유화 조치를 통해 라모스는 공산반군과 평화 협상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라모스는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상당히 성공했다.코라손 임기말년인

지난 91년 필리핀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실업률이 연 10%를

웃돌았으나 라모스 집권기간중 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았다.평균

성장률은 연 8%내외로

올라갔고 물가도 안정됐다.코라손의 경제 실정(失政)을 라모스가 회복시키고

있다는 평가다.이 때문에 최근 필리핀에선 6년 단임으로 묶어놓은 헌법을

고쳐 라모스에게 연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야당과

아키노 전대통령.가톨릭등 많은 세력들이 개헌을 반대하고 있고 라모스대통령도 그럴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지만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는 아직까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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