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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배후에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 첩보전 방불케하는 脫北전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황장엽(黃長燁)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에는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북민협)가 깊숙이 개입했다.북민협은 95년말부터 黃과 김덕홍(金德弘)여광무역총사장을 극비 접촉하면서 黃의 망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동안 黃과 만난 학자들은 黃에게'자본주의 충격파'를 던져주었을 뿐 망명 장정(長征)과는 관계가 없다.기업인들은 노동당의 외화벌이와 식량조달 창구였다.

黃은 북민협에만 망명의 문을 두드렸고 거사를 숙의했다.黃의 망명은 북민협의 끈질긴 노력과 黃의 자유의사의 복합체에 다름아니다.

북민협의 막후 창구는 L(70)씨다.한국전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직할 첩보부대(KLO)의 고트(Goat)대장 출신 사업가다.L씨는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무역업을 해오다 93년 북민협의 핵심 간부를 맡았다.

L씨가 黃의 심복인 金을 처음 만난 것은 95년말께다.베이징(北京)등지를 드나들면서 사업관계로 金을 알게 됐다.

L씨와 金은 자주 얼굴을 맞대면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됐다.여기에는 L씨가 원산 출신이라는 점이 한몫한 것으로 전해진다.자연스레 북한체제에 관한 깊숙한 얘기도 오갔다.

96년 3월14일.이날은 金이 처음으로 L씨에게 黃의 망명의사를 털어놓은 날이다.장소는 베이징 시내 모호텔 객실.

金은 북한의 신무기와 군사력에 대한 얘기를 하다 망명에 관한 얘기를 불쑥 꺼냈다.

“당신이 우리를 지원해 주고 보호해줘야 한다.우리 망명자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고 있는가.”사실상의 망명 타진이었다.

그러면서 金은“북한의 첩자들이 상당수 남한에 침투돼 있다.각계 기관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한국전쟁 당시 남북 첩보전선의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L씨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L씨는 金과 헤어지자마자 金의 발언을 북민협쪽에 알렸다.정확한 의도를 분석하기 위해서다.

북민협에서는 金의 발언 진의를 놓고 고심한 것으로 전해진다.북민협 관계자는“당시 金의 발언을 반신반의하면서 金과 조심스럽게 접촉해나갔다”고 말했다.북민협은 이후 L씨에게 金을 만날 때의 행동지침을 보냈다.

“김덕홍의 암호명을 폴 킴(Paul Kim)으로 할 것”“호텔 객실에서 만날 때는 반드시 TV나 라디오를 켜둘 것”“한 호텔에서 계속 만나지 말 것”등등….

북민협은 당시 저간의 사정을 당국에 통보하지 않았다.金이 한국 각계에서 첩자가 암약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96년 7월3일 베이징 시내의 한 민가.L씨와 黃이 자리를 함께 했다.黃은 이날 확실하게 망명의 뜻을 전달했다.金이 망명의사를 타진한 이후 4개월만이다.

10분여간에 걸쳐 얘기를 주고받은 뒤 黃은“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극비로 해주어야한다.그쪽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 사람이 박혀있다”고 강조했다.당국에 자신의 망명의사를 알려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였다.

북민협 관계자는“黃이 L씨를 망명 창구로 잡은 것은 L씨의 4촌형(95년 사망)이 黃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L씨의 4촌형은 북한군 고위장성을 지낸 '소련파'로 러시아에서 살았다.그는 90년 4월 김일성(金日成)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1계급 명예특진을 하는등 다른 소련파와 달리 친북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L씨와 金의 만남은 계속됐다.黃은 96년 11월10일 金을 통해 망명 동기와 실행계획을 적은 친필 서신을 L씨에게 넘겨주었다.黃은 서신에서'거사 D데이를 김정일(金正日)이 주석으로 취임할 예정인 97년 7월 이전으로 잡았다'고 했

다.이후 黃의 서신은 세차례 더 전달된다.

97년 1월3일.黃은 金을 통해 자신의 방일(訪日)일정표를 L씨에게 건네준다.거사 D데이는 방일 기간중인 2월4~9일로 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黃이“가능하다면 북에 남아 평화통일을 돕고 싶다”고 발을 뺐기 때문이다.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을 북한에 초청해주면 북한에 더 머무를 수 있다며 L씨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黃은 원래 일정대로 망명을 실행키로 했다.그러나 당초 망명지로 정했던 일본에서의 거사는 조총련 수행원의 밀착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黃은 결국 중국 도착 다음날인 2월12일 베이징의 숙소를 빠져나와 망명을 신청했다.

당시 베이징주재 한국 총영사관측은 미리 마중을 나와“어서 오십시오”라며 黃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黃은 망명직전 수양딸 박명애(朴明愛.34)를 한국 총영사관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했다.朴은 2월10일 오후1시쯤 옌지(延吉)에서 金의 전화를 받았다.

“평양 상황이 심상치 않다.당신 때문에 黃비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한다.빨리 베이징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朴은 다음날인 11일 선양(瀋陽)에 도착,다시“베이징으로 급히 오라”는 黃의 전화를 받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김정일 생일(2월16일) 참석 문제를 처리하느라 12일 오전에야 베이징에 도착했다.이미 黃이 망명한 뒤였다.

그녀는 여광무역총회사에서 黃을 기다리던중 랴오닝(遼寧)성 대표단 방북문제로 다시 선양으로 되돌아왔다.

12일 오후8시쯤 朴은 金으로부터“한국대사관에 망명했으니 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이미 黃의 망명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베이징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때였다.朴은 현재 중국 모처에서 은신중이다. 〈유영구.오영환 기자〉

<사진설명>

황장엽씨가 95년 2월 평양을 방문한 펑위중(馮玉忠)전랴오닝대 총장,수양딸

박명애씨와 함께 노동당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기업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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