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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의 편지쓰기 - 붓으로 또박또박 받는 감동 옛사랑 만난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꽃샘 바람에 실려왔던 가랑비가 그치면서 눈앞의 서울이 그렇게도 선명할 수가 없었다.하늘에는 구름이 사라졌고,햇살을 산란시킬 먼지조차 가라앉아 천지가 고즈넉했다.이런 날을 전에 언제 봤던가 기억을 더듬었으나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하다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후 청회빛 날개를 퍼득이며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들었다.분홍 부리에 가수 장사익씨의 편지를 물고.

8절지 한장 반만한 널찍한 한지에 붓이 흘러간 자국이 경쾌하게 남아 있었다.약간 흘림체인 정갈한 글씨들에서 향기가 스며왔다.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 진동은 가슴을 관통한다.한줄의 미사여구도,한 글자의 꾸밈도 없는 그의 편지는 시였고 일기장이었다.짧은 글속의 그 숱한 사연과 고민들.여백은 편지에서 가장 큰 부분이었다.

마흔 넘어'하늘 가는 길'이라는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복차림으로'국밥집에서''찔레꽃'등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노래를 부르는 가수 장사익.생각날 때마다 집에서 붓을 들어 고마운 사람,보고싶은 사람들에게 몇자 적는다고 했다.세상

사는데 서로의 마음이 오가는 것만큼 따뜻한게 어디 또 있겠냐며.

그가 띄운 작은 편지는 파문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른다.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알수없는 흥분에 휩싸였다고 고백했다.잃어버린 옛 사랑을 만난 기분이라고도 했다.마음과 마음이 만난다는 것,이는 큰 행복입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이젠

친구들에게 글을 좀 보내보렵니다,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편지도 그중 하나다.

편지가 생활의 일부였던 시절이 있었다.그때는 통신수단을 넘어 자신을 표현하는 문학 작품의 반열에 편지가 올라있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했다.일기를 대하듯 마음을 솔직히 드러낸채 시를 쓰듯 한자한자 갈고 닦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편지에서는 쓴 사람의 마음가짐과 숨결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매개체로 한 인간관계는 솔직하고 담백할 수밖에 없었고.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자신이나 조상의 문집을 때 서간을 일일이 모아 함께 수록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올해 출간 60주년을 맞는 모윤숙의'렌의 애가'역시 서간체 수필이 아니던가.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자.보낼 수 없다 하더라도.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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