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랑스 없이 미래 성장동력은 꽃피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4호 34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얼마 전 인형 판매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업체는 사르코지를 모델로 한 ‘부두(voodoo) 인형’을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판매 중이다. 부두란 서인도제도(諸島)에서 유래한 주술적 종교로, 부두 인형은 특정인을 저주할 때 바늘로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형 설명서에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어느 부위를 찔러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격분한 사르코지는 인형의 판매를 금지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업체 관계자는 “사르코지는 정치인이자 공인”이라며 “부두 인형의 판금 요구는 그를 풍자한 제품의 유머러스한 특성을 무시한 부당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프랑스 항소법원도 업체의 손을 들어 주었다. 판매 금지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지난달 29일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대신 포장지에 ‘이 키트의 바늘로 인형을 찌르는 것은 사르코지의 존엄성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경고문을 표기하게 했다.

인형을 통해 특정인을 저주하는 행위는 부두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구석기시대 크로마뇽인도 유사한 행위를 했다. 동굴 깊은 곳에 사냥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공감 주술’이라고 부른다. 공감 주술이란 원하는 결과를 모방하면 그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다. 선사시대 화가들은 화살이 들소 옆구리를 꿰뚫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 행위 자체가 실제로 사냥 현장에서 들소를 활로 쏘아 맞히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예술작품을 창조한 목적은 미적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식량으로 쓸 동물의 포획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심미가’가 아니라 ‘주술사’였고, 예술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주술이었다.

공감 주술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조선시대 궁중 비사를 다룬 텔레비전 사극을 떠올리면 된다. 미워하는 사람을 해코지하려는 목적으로 짚으로 사람 모양의 물건(우리말로 ‘제웅’이라고 한다)을 만들고 여기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록한 종이를 접어 넣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 놓고 화살을 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방자’ 또는 ‘방자질’이라고 한다. 국회 앞이나 서울시청 앞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화형식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동서고금에 보편화된 공감 주술을 그저 터무니없는 미신적 습속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넘겨버릴 수 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운동선수의 사진을 신문에서 오려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바늘로 그의 눈을 파내는 행위를 즐길 수 있을까? 신문지의 글씨가 인쇄된 곳에 구멍을 내듯 아무 느낌 없이 인물 사진에서 눈을 파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진에 대해 내가 저지른 행동이 그 사진의 실제 인물에게 한 행동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어디엔가 찜찜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상하고 불합리한’ 생각은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속에 본능처럼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 본성이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부두 인형 보도를 접하고 두 번 놀랐다. 먼저 자국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그런 인형을 만들어 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란 이유로 용인해 준 프랑스 사법부의 판결에 다시 한번 놀랐다. 과연 톨레랑스(관용)의 나라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금기에 대한 도전을 당연시하는 풍토에서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도 가능했을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그런 놀람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첫 번째 놀람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네티즌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반대 의견을 찍어 누르기에 거침없는 살벌한 세태에서 두 번째 놀람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표현의 자유가 문화예술의 창조력을 키우는 밑거름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동의와 비전 같은 소프트파워를 결여한 채 공권력 같은 하드파워만을 능사로 삼는 천박한 풍토에서 자칫 미래 성장동력마저 잠식될까 걱정이다. 궁극적으로 창조적 문화 없이는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도, 1인당 소득 4만 달러 시대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0년, 100년 뒤를 내다보는 지성적 리더십이 아쉽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