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저CO₂녹색성장 추진 이렇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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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선포한 ‘저탄소 녹색성장’ 비전이 4개월 지나면서 추진력이 붙기 시작했다. 정부부처의 내년도 대통령 업무보고가 앞당겨진 가운데 거의 전 부처가 녹색성장을 핵심 과제에 담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비전 발표 이후 얼마 동안 ‘종합적 국가비전’이란 인식을 심어주지 못해 부처마다 중구난방의 정책을 내놓거나 신성장동력을 총괄하는 지식경제부의 업무로만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경제위기 조기 극복까지 염두에 둔 ‘그린 뉴딜’로 강조되고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자 부쩍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와대 미래기획위원회는 내년 1월 중 ‘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하고 민간 중심의 녹색성장위원회와 기획단을 발족할 계획이다. 김상협 미래비전 비서관은 “그린 뉴딜은 에너지· 환경문제, 일자리 창출, 성장동력 확충, 기업경쟁력 강화, 국토 형성, 생활혁명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했다.

◆ 저에너지 소비사회로=1973년 1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했다. 70년의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미군 철수에서 야기된 국방 안보 논란에서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을 생각했다. 이 생각을 책임지고 밀어붙인 인물이 당시 오원철 경제 제2비서관이었다. 그는 ‘무기도 해체하면 모두 부품이다’는 개념을 잡고 방위산업과 민수산업의 연계를 추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중화학공업 정책의 핵심이다. 이 정책은 77년 미 민주당 출신의 카터 대통령 출범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카터가 다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화학공업 정책은 79년 10·26사건과 함께 퇴색되며 80년대에는 대대적인 조정을 거치게 된다.


이후 국가가 나서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제시하거나 끌고 나간 적은 없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 육성과 정보기술(IT) 산업 발전은 민간 주도에 정부 지원의 형태로 실현됐다. 지금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산업의 대부분은 70년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철강·조선·석유화학·자동차 산업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엔지니어와 기술자들도 당시부터 양성된 인력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경제는 이른바 ‘오원철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은 우리 사회를 고에너지 소비구조로 몰아 넣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이에 대해 중화학공업 정책이 완결을 보지 못한 채 80년대 들어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은 저에너지 소비형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35년 만의 탈(脫) 오원철’ 을 의미한다.

◆한국과 일본이 똑같이 겪은 석유위기지만=73년 제1차, 79년 제2차 석유위기 과정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한 반면 일본은 반도체와 가전 등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바꾸었다. 우리가 고에너지 소비형 ‘중후장대 산업’을 추진했다면 일본은 저에너지 소비형 ‘경박단소 산업’을 지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에너지를 줄이는 성(省)에너지기술(문라이트 계획)과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신재생에너지 기술(선샤인 계획) 전략을 추진한다. 일본 통산성(지금은 경제산업성)이 80년 국가에너지 전략을 총괄할 정부기구로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를 설립해 세계적인 에너지 연구개발과 정책의 허브로 자리 잡게 했다.

◆동일선상에 선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세계는 지금 한목소리다. ‘클린 테크, 그린 비즈’로 요약된다. 한국의 저탄소 녹색성장과 다르지 않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 탄생은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싸움이 아니라 ‘변혁’을 의미한다. 오바마의 목표는 효과에 집중하는 현명한 정부다. 오바마 차기 대통령은 석유 대체기술에 적극 투자해 500만 명의 고용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그린 뉴딜이다. 환경 보호와 고용 확보를 동시에 실현하는 산업정책으로 주목된다. 오바마가 에너지장관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현재 대체에너지 개발을 하고 있는 스티븐 추 박사를, 대통령 과학기술보좌관에 존 홀드런 하버드대 환경정책학과 교수를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은 수백억 달러에서 수천억 달러의 경기대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경제성장을 위해 성에너지·IT 등에 많은 자금을 돌리고 있다. 일본 국제공공연구센터의 다나카 나오키 이사장은 “글로벌화의 긍정적인 면을 살려 경제위기를 오히려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기회로 삼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파나소닉(옛 마쓰시타)과 도시바는 내년에 연료전지와 축전지 등에 4000억~1조원가량 투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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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정책 아이디어를, 민간은 일머리를 잡아야=과거 중화학공업 정책은 정부가 약 2년간에 걸쳐 준비를 해온 데다 정부가 기업을 장악할 수 있었던 시절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민간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다. 정부의 경제정책(대부분 거시정책)을 민간 쪽이 주로 맡을 녹색성장(대부분 미시정책)에 잘 맞춰야 한다. 산업연구원 송병준 선임연구위원은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이 성공하려면 과거와는 달리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및 인력 확충 등 기업전략을 정부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넣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경제정책을 경기대책기, 재정 재건기, 경제성장기로 나누어 볼 때 이에 부합하는 녹색성장, 즉 그린 뉴딜의 사업 내용이 쪼개져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선 정부의 선도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부처 간의 갈등 조정과 단합된 정부의 의지를 보여줄 ‘차관회의’의 강화가 필요하다. 인력 양성과 재교육, 광역 경제권을 포함한 국토 형성 계획, 일자리 만들기 등은 정권을 부양시킬 수도 있고 가라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부처 내 또는 부처를 넘어 얽혀 있는 많은 법과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조망하면서 종합적인 국가비전을 끌고 나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정부와 기업이 ▶자원·에너지·식량·물 문제 해소 ▶저탄소 사회 실현 ▶이노베이션의 촉진 ▶ 조세·재정·사회보장의 개혁 실현을 위해 손을 잡아야 할 때다.

곽재원 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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