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비상>下. 주부실업도 심각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주부들에게도 이제 일은'선택'이 아닌'필수'가 돼버렸다.기업마다 불어닥친 경영합리화 바람속에 한창 나이의 가장들이 실직자로 내몰리는 이즈음,살림솜씨 야무진 아내 노릇만으론'살아남기'힘들어진 것이다.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남편만 쳐다

보며 불안감에 떨기보다 직접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정경제를 떠받쳐보려는 맹렬 주부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달전 삼성생명 생활설계사로 나선 이경희(李炅姬.34.서울강동구천호동)씨.“경기도 안좋다는데 사업하는 남편 수입에만 의지할 수는 없겠더라구요.처음엔 대학원까지 나온 제가 보험세일즈를 한다는게 좀 창피스럽기도 했지만 동료들중에도 고

학력 주부가 대다수여서 놀랐어요.”李씨가 근무하는 대원리젤 영업소에만해도 의사.변호사.은행 지점장집'사모님'들이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예전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하는걸로 여겨졌던 보험 세일즈에까지 중산층 주부들이 뛰어드는 현실은 뒤집어보면 주부들의 취업난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명문대출신의 미혼남녀도 일자리를 못구한 사람이 적지않은 형편에 사실 경험없는 주부들이 마땅한 직업을 찾기란 어려운 일.

아쉬운대로 백화점이며 방송국등 각종 주부모니터 모집에 응모했다가 번번이 미역국을 먹은 김은숙(金銀淑.38.경기도고양시)씨는“정식사원도 아니고 돈도 얼마 못버는 모니터 되기조차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푸념한다.

하지만 운좋게 일거리를 얻는다고 해도 대개 정규사원이 아닌 비정규 계약사원,직종도 판매.영업직이 대부분.보험.학습지.화장품등의 업종에서 보편화된 주부 판촉사원들은 최근엔 가전제품.자동차 분야까지 파고들어 대우.삼성.LG전자에만 도합 3만여명의 주부 판매원들이 뛰고있다.

이같이 주부취업이 비정규 판매직에 몰려 있는 것이야말로 주부들의 고용환경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배경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한국여성개발원 김영옥(金榮玉)연구원은“비정규 판매사원은 재계약여부에 따라 언제든 직장에서 떨려날 수 있는데다 성과급제이므로 수입도 고정적일 수 없다”며 주부인력이라면 무조건 값싸게 부리려고만 하는 기업체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주부실

업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능력과 상관없이 전문직.사무직만 선호하는 주부들의 허황된 기대수준 역시 취업의 큰 걸림돌이라는게 金연구원의 말.

지난해 10월 중소기업진흥공단 주최로 열렸던 여성취업박람회는 그 좋은 예.1백22개 참여업체 대다수가 유통.출판.서비스업종으로 영업.생산사원을 모집하려한 반면 취업희망 주부들은 비서등 사무직만 선호해 양쪽을 연결하기가 매우 힘들었

다는 것이다.

여성자원금고 김근화(金根和)이사장은“직장경험도 전문기술도 갖지못한 주부들일수록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곳을 통해 텔레마케팅 교육을 받은 2천5백여명의 졸업생들은 최근 수요가 늘며 백화점.제2금융권.호텔등에서 활약중이다.

이화여대 전문비서교육센터의 컨설턴트 황은미(黃恩美)씨는“현재 단순기능 지도 위주로 돼있는 주부취업 재교육을 서구처럼 학력과 계층에 맞게 다양화하는게 시급하다”며 사회 각 기관에서 주부 재교육을 활성화할 것을 주장한다.

한편 좁은 취업문을 뚫지못한 주부들에게는 소자본창업이 또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창업전문가들은 조언한다.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골라 치밀하게 준비한다면 쏠쏠한 재미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명예퇴직하자 3주전 동네어귀에 미용실을 차린 신승옥(申承玉.47.서울은평구불광동)씨는“1년간 사회복지관에서 미용교육을 받은게 큰 도움이 됐다”면서“미리미리 준비했던 탓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둔 충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귀띔한다.

〈신예리 기자〉

<사진설명>

가정경제를 떠받치는 한 축이 되고자 취업전선에 나서는 주부들이 늘고있다.사진은 대졸이상 주부 생활설계사들로만 구성된 삼성생명 대원리젤영업소의 회의장면. 〈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