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20조 풀었다는데 … 중소기업 돈맥경화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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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에서 전선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박모(49) 사장은 이달 초 2억원의 운전자금을 빌리러 은행에 갔다 퇴짜를 맞았다. 그는 “연말 결산 때문에 내년 초에나 대출이 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며 “돈이 많이 풀렸다는데 다 어디 간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우리 회사의 신용등급은 BBB+로 중소기업치고는 좋은 편인데도 대출금리는 거의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두 달여 동안 2.25%포인트 내리고, 금융회사에 전방위로 돈을 풀어도 시중의 ‘돈맥경화’는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다. 은행들이 돈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으면서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22일 한은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 중순 미국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한은이 금융회사에 공급한 자금은 20조원에 이른다.

또 은행이 고금리 특판예금 판매에 주력하면서 올 들어 11월까지 은행의 원화 조달은 1131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 늘었다. 한때 은행의 돈줄이 마르긴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풀렸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기업과 가계의 체감 자금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은행이 좀처럼 금고를 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은 8월부터 급감했다가 11월 4조1000억원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올 상반기 월 평균액(5조9000억원)엔 크게 못 미친다.

시중은행 여신담당자는 “대출이 늘어나면 위험자산이 많아져 은행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진다”며 “현 시점에서 무작정 대출을 늘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금리 인하 이후 양도성예금증서(CD) 등 시중금리는 큰 폭으로 내리고 있지만 중소기업 대출금리는 소폭 하락하는 데 그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시장금리를 고려한 중소기업 대출의 평균 금리는 19일 현재 6.8~7%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는 10월 말에 비해 0.86~1.06%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간 6개월 만기 은행채(AAA)의 금리는 2.01%포인트나 하락했다. 대출의 기준이 되는 금리에 비해 실제 대출금리의 하락폭은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 관계자는 “기업들은 대개 6개월 변동금리로 대출을 많이 한다”며 “지금 대출금리가 하락하더라도 당장 금리 변동 시점이 아니라면 금리가 여전히 높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중소기업단체협의회가 이달 5~8일 238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2.2%가 “저금리가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또 10월 말 정부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대책 발표 이후에도 중소기업의 실질 대출금리는 평균 7.3%에서 8.7%로 되레 1.4%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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