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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 대한 잘못된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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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며칠 전 재계 어느 고위인사는 한 여권인사를 만났더니 "정권을 길들이기 위해 대기업들이 일부러 투자를 기피하고 있지 않으냐"고 넌지시 다그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대통령을 길들이기 위해 해야 할 투자를 하지 않고, 대통령을 봐주기 위해 안해도 될 투자를 한다면 이는 제대로 된 투자가 아니다. 투자 여부를 '개혁 저지의 무기'로 삼고, 투자 부진을 '자본의 파업'으로 몰아치는 대결구도라면 경제살리기 논의는 피차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의 우리 경제는 분명 위기는 아니다. 국가부도가 날 상황도 아니고, 고유가와 중국쇼크,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 등 해외 악재들이 계속 짓누르고는 있지만 당장 경제가 주저앉을 처지도 아니다. 일부 잘 나가는 수출업종을 제외하고는 국민의 90%가 위기라고 느낄 정도로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중이다.

경제덩치가 작고 수출에 매달려 있던 시절에는 수출만 잘 되면 만사형통이었다. 지금은 내수시장 비중이 더 크고 수출산업의 국내산업 파급효과도 전 같지가 않다. 산업의 정보기술(IT)화가 진전될수록 고용은 감소하고 수출의 주력 정보산업 제품은 핵심 고기능 부품들을 수입에 의존해 수출이 느는 만큼 국내 파급효과는 크지 않다.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고수준이라지만 여기에는 투자 부진으로 덩치가 큰 원자재 수입이 늘지 않는 탓도 무시 못한다. 해외에 공장을 뜯어옮기는 것도 수출실적에 잡히는 상황에서 수출만 보고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우리 경제는 당장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위기는 아니지만 성장엔진이 식으면서 기초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장기들의 기능이 저하되면서 시름시름 중병을 앓고 있는 격이다. 오늘의 내수불황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자업자득이다. 실력과 분수를 넘어 대출이나 신용카드로 미래의 것을 앞당겨 산 결과다. 여기에는 주택경기 활성화와 신용사회 조기정착을 구실로 정부가 부추긴 측면 또한 적지 않다.

거품이 꺼지고, 400만 신용불량자가 상징하듯 이제는 더 돌려쓰거나 앞당겨 쓸 길도 막혀버렸다. 기업의 투자 부진은 기본적으로 제품기술력과 새로운 시장개척능력이 한계에 왔음을 방증한다. 게다가 반(反)기업 정서, 노사관계 불안, 일부 사회주의적 기류가 기업가 의욕마저 꺾고 있다.

거품은 꺼져야 하고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경제주체들이 스스로 거듭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우리가 뭘,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관한 국가 차원의 전략과 자신감이 중요하다. 이런 희망이 보이지 않고, '이럴 바에야 세상이나 뒤집어져라'는 식의 막가파식 정서가 일부 분출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진 자의 위기의식이 '해외 대탈출'로 부풀려지기도 한다.

게다가 주한미군 재배치를 둘러싼 한.미동맹의 불안과 한.미관계 변화는 우리 경제에 대한 바깥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가장 잘 나가는 수출기업들은 하나같이 외국인지분이 절반을 넘는 글로벌 기업들이다. 이들의 돈과 신뢰를 붙들어두는 일도 쉽지는 않다.

'위기다' '아니다'는 논쟁은 시간낭비다. 경제살리기에 정부는 결코 만능이 아니며, 정책수단 또한 스스로 한계가 있다. 경제주체들이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

변상근 월간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