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50년 발자취-군소 土建업체로 출발, 한국중공업의 산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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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현대그룹은 46년 세운 현대자동차공업사와 47년 창립한 현대토건사가 토대다.현대자동차공업사를 먼저 세웠지만 그룹 창립일은 현대토건의 창립일인 47년5월25일을 기준으로 삼는다.창립때 사옥은 서울 초동에 있던 현대자동차공업사의 가건물로,간판도 현대토건이라고 달았다.

정주영(鄭周永)그룹명예회장의 연설문집'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에 따르면 당시 큰 토건회사들은 미군 공사를 독점했으며 현대토건은 하청을 맡은 군소업체중의 하나였다.50년1월 양사는 현대건설주식회사로 통합된다.

한국전쟁이 끝난뒤 57년 정부가 발주한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함으로써 현대는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또 60년 계약액 1백만달러가 넘는 인천 도크공사를 끝낸 현대는 무교동 사옥으로 이사하면서 건설업 랭킹 1위로

올라섰다.

61년 5.16쿠데타때 현대는 국고환수 대상에서 빠졌다.군사정부가 국토건설에 필요한 업체로 분류했기 때문이다.이어 67년11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이 鄭명예회장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다.고속도로 건설사업에 나선 鄭명예회장

은 매일 새벽4시면 지프를 타고 현장에 달려가기도 했다.

그해 12월 鄭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설립함으로써 새로운 꿈의 실현에 나섰다.이때부터 현대는 국산차 생산의 길로 달려 76년2월 마침내 국산차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鄭명예회장은 건설.자동차에 이어 선박등 중공업에도 뛰어들었다.70년대 중반이후 현대는 중동바람으로 다시 건설업의 부흥을 이룩했다.'중동신화'라는 신조어도 현대가 주체가 됐다.

77년 전경련(全經聯)회장에 취임한 鄭명예회장은 81년에는 서울올림픽(88년)유치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83년 현대는 또다시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쪽으로 눈을 돌렸다.건설.자동차.중공업.전자등 주요 기간산업에 모두 진출한 현대는 9

0년대 들어 세계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에 나서고 있다.96년1월 창업주의 2세인 정몽구(鄭夢九)회장이 삼촌인 정세영(鄭世永)회장으로부터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았다.신임 鄭회장은 가치경영.세계경영등의 기치를 내걸고 현대그룹의 21세기 새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박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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