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가는간이역>18. 군위 화본역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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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자욱한 안개가 어둠속으로 스멀스멀 밀려든다.인적도 차량의 통행도 없는 군위의 밤거리.나트륨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봄밤 뿌연 안개속에 부서진다.

군위읍에는 매년 이맘 때면 3일에 한번꼴로 밤안개가 낀다.안동댐이 건설된 후 나타나는 복사무 현상이다.도시민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이는 짙은 안개지만 교통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이곳 주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중앙선이 지나는 군위군에는 우보.화본.봉림역이 있다.자그마한 마을 가운데 위치한 화본역.깔끔하면서도 고즈넉한 역사(驛舍)엔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역구내 한켠엔 취수탑이 남아 있다.목마른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지난 시절의 상

징물이다.38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진 취수탑은 시멘트 구조물만 남아 지난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플랫폼에 서있으면 취수탑 너머로 증기기관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역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 작은 시골역은 그러나 한국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가지의 유적을 지척에 두고 있다.8백여년전 일연(一然.1206~89)선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인각사(사적 374호.경북군위군고로면화북리)와 경주 석굴암(국보 24호)보다

앞서 만들어진 삼존석불(국보 109호.군위군부계면남산동.일명 제2석굴암)이 각각 역에서 17㎞ 떨어져 있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삼존석불은 경주 석굴암보다 일찍 만들어졌으나 정확한 조성 연대는 분명치 않다.일부에서는'신라 21대 소지왕15년(493년) 극달화상에 의해 조성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송주현(宋周鉉.61)문화재관리국 건조물담당은“삼국시대 양식과 같은 점으로 미뤄 삼국통일 이후 경주 석굴암 조성양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그 조형 연대를'70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지상에서 높이 20의 자연석굴에 아미타불.대세지보살.관세음보살등 3개의 석불이 안치돼 있다.이 석굴은 그동안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지다 1927년 인근 한밤마을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석굴암 주지 법등(法燈)스님은 “이곳을 처음 찾았던 60년대에는 석굴 원형이 노출되지 않았다”며 “출렁다리로 개울을 건넌 뒤 밧줄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 석굴의 예술적인 측면에 대해 중광(重光)스님은“삼존석불은 순수하고 소박한 반면 경주 석굴암은 섬세하고 화려하다”며“작품에 작가의 혼이 들어가 있어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이 석굴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삼국유사는 민간의 전설.미신.설화등을 집대성한 고문이다.특히 삼국사는 물론 가락국과 고조선 역사까지 소개하고 있어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여기에는 신라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 이두 연구에 빼놓

을 수 없는 사료로 손꼽힌다.

고려 충렬왕10년(1284년) 일연선사는 노모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향 근처인 지금의 인각사에 들어간다.당시 그의 나이는 79세.이곳에서 일연은 5년간 신화.전설.시가.설화등을 모아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충렬왕15년 84

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그 뒤 제자인 혼구(混丘.1251~1322)대사가 삼국유사 5권 첫머리에'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 주지 원경 충조 대선사 일연 찬(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고 적음으로써 삼국유사가 일연의 작품인 것을

알게 됐다.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보각국사 정조지탑및 비(보물 제428호)에서 희미하게나마 일연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특히 보각국사 추모비는'비석의 글씨를 가루로 만들어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고 믿었던 선비들 때문에 형체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돼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각사에는 일연선사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다.그러나 옛 모습은 찾을 길 없고 학술탐사조차 미미한 실정이다.스러져 가는 인각사의 모습을 둘러보며'문화유산의 해'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군위=김세준 기자〉

<사진설명>

군위 화본역 구내 한켠에 서있는 취수탑.이 취수탑을 보노라면 목마른

증기기관차가 금방 역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추억에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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