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渡美.김구 은신 후견자는 피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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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백범 김구(金九)가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당시 그의 생명을 구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인 목사 고(故) 조지 피치(1883~사망연도 미확인)의 서한과 비망록등을 묶은 문서집이 공개됐다.

중국 선교사로 활동했던 피치는 해방후 남한에 들어와 미군정 자문역할을 했고,정부수립 이후에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정계.교육계.종교계.문화계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피치문서'가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같은

피치의 역할과 위상 때문.

국립중앙도서관(관장 金鎭武)이 해외자료 수집의 일환으로 미국 하버드대 옌징(燕京)연구소에서'피치문서'를 입수한 것은 지난해 8월.

그동안 관련 연구자들에게 자료 검토와 해제작업을 의뢰해 최근 3천2백14장의 자료를 총12책으로 엮어 공개했다.이 문서집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뒷얘기는 물론 해방정국과 건국초기 한국사회의 이면(裏面)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

료가 많이 포함돼 있어 3.1절을 맞은 시점에서 특별한 감회를 준다.

이 문서집에서 확인된 사실은 피치목사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후견자였다는 것.1921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정'임시 대통령'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이 미국 호놀룰루로 몰래 건너가기 위해 배표를 구하려 했으나 이를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해결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피치였다.

피치는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이승만이 무사히 상하이에서 미국까지 가도록 도중에 필리핀의 주요 인사들을 은밀하게 접촉할 것을 미국 관리들과 긴밀하게 상의했다.

또 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사가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왕(日王) 생일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체포된 그날밤,김구 일행 4명이 일본경찰에 쫓기자 피치목사가 이들을 한달간이나 자기 집에 숨겨주었던 것이다.이후 김구는 피치를

자기 생명의 은인으로 소개하곤 했다.'백범일지'에도 이런 사실이 언급돼 있다.

'피치문서'에 포함돼 있는 서한등을 통해 새로 드러난 흥미있는 사실은 해방이후 남한을 3년간 통치한 미 군정이 손잡고 일하려 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선택 기준.미군정은 정치적 야심이나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어떤 일을 맡겨도 수행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들을 선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미군정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경영인.교육자.사회운동가.종교인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외에도 피치목사 부부의 여수.순천사태(48년 10월)체험기는 당시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빚어진 한국사회 혼란상의 단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손양원 목사의 자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되는 장면,국군과 경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좌익분자들을 색출해 처단하는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또 피치목사의 부인인 제럴딘 피치가 한국의 여성대학 설립과 운영에 대해 임영신(任永信.前중앙대총장).배상명(裵祥明.상명학원 설립자)등 교육계 주요 여성인사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은 당시 여성교육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피치문서'에는'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서한도 들어 있다.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51년 1월27일 안익태는 제럴딘 피치에게 서한을 보내“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6.25전쟁으로 죽어가

는 한국인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으니 주미(駐美)한국대사관측이 나를 문화고문으로 초청해주도록 힘써 달라”고 간청했다.안익태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동현 현대사전문기자〉

<사진설명>

1947년 7월 YMCA 국제위원회 협력간사로 한국에 들어온 피치목사(뒷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한국YMCA연합회 간부들과 자리를 함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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