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문화] 이집트 카이로의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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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시내 한 카페에서 물담배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집트 인들. [서정민 특파원]

카이로의 밤은 길다. 5월이지만 벌써 40도를 오르내리는 낮엔 문화생활이란 거의 없다.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뿐이다. 공연이고 연주회고 보통 오후 10시에 시작된다. 밤이 되면 낮보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곳이 카이로다. 한낮에 더위를 접고 서늘한 사막의 밤공기와 함께 이집트인들은 본격적인 문화생활을 시작한다.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의 밤문화는 마크하(카페) 문화다. 한국처럼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라기보다 영국의 펍, 독일의 호프 플라자처럼 왁자지껄한 흥겨운 모임의 장이다. 이집트의 아무리 작은 마을에 가도 이 같은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카이로 남부 알마디의 서민 지역인 바사틴 거리. '한집 건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카페가 밀집해 있다. 상업지역도 아니고 부자촌도 아니지만 밤이 되면 거리 곳곳에 의자와 티테이블을 내놓은 작은 카페들이 문을 연다.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모여드는 동네사람들로 거리 전체는 흥겨운 잔치마당 같다. 삼삼오오 차를 시켜놓고 정치.경제.연예계 를 소재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들의 밤샘 이야기를 돕는 것은 단연 시샤(물담배)다.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 전통 때문에 중동인들은 물담배를 '병적으로' 즐긴다. 나르질라.아르길라라고도 불리는 시샤는 물을 필터로 사용하는 중동지역의 담배다. 꿀.사과.딸기.멜론.장미.체리.바나나 등 여러 재료와 담배를 섞어 만든 시샤는 아랍인들의 최대 기호품이다. 연기가 자욱한 카페를 들어서면 뿜어내는 각종 과일냄새가 코에 훅 끼친다.

홍차 혹은 에스프레소와 비슷한 터키식 커피를 시켜놓고 이집트인들은 물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정리한다. 서민지역의 카페에서는 1파운드(약200원)만 내면 물담배의 향을 즐길 수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은 숯 열기 밑으로 타들어가는 담배 향기를 들이마신다.

한번에 보통 30분 정도 피울 수 있는 물담배와 함께 이집트인들은 온갖 주제의 토론을 벌이거나 타윌라라는 주사위 놀이에 열중한다. 주머니가 얄팍한 서민들은 시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보통 담배 한대로 두 세 시간은 족히 보낸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카페 주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손님에 대한 환대가 아랍 전통의 가장 큰 덕목이기 때문이다.

카페에 따라 토론 주제가 달라지기도 한다. 카이로 시내 중심부인 바빌루크 지역에 위치한 '스트란드' 카페는 정치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 카페에 모인 정치인들은 종종 편이 갈려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카이로 동부 후세인 지역에 있는 '알피샤위' 카페는 문인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다. 1773년에 문을 연 이곳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나깁 마흐푸즈와 이집트 문학의 현대화를 주창한 타우피크 알하킴이 즐겨 앉던 의자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카페문화는 남자들이 주도한다. 주로 밤에 흥청대는 카페에 여자들이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는 카이로의 헬리오폴리스 등 부촌을 중심으로 남녀 커플을 위한 카페가 급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집트 여성들 사이에 물담배 흡연이 하나의 유행처럼 빠르게 번져 나가고 있다.

이집트의 사회연구소에서는 최근 카이로 여성들의 물담배 흡연율이 20~30%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특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여성들 사이에서 물담배 흡연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일반 필터담배 흡연에는 상당히 관대한 이집트인들이지만, 밤문화의 상징인 물담배를 즐기는 여성이 느는 데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이제 여성들이 안방(집)을 버리고 우리의 사랑방(카페)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남자들은 푸념한다. 그러나 이슬람권도 여권신장과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남성들의 불평은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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