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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한보 정책잘못 분명히 밝혀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검찰의 한보대출 비리사건 종결발표를 앞두고 정부는 정책이 어떻게 잘못됐기에 이번 사태가 발생했는가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기를 다시 촉구한다.이수성(李壽成)국무총리는 재외공관장회의에서“정책판단과정에서 정부책임이 있음을 자인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같은날 한승수(韓昇洙)경제부총리는 신한국당에서 “민간자율시대에 정부가 금융기관의 대출활동을 일일이 파악하거나 관여하지 않을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말해 정부책임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한 내각에서 이 무슨 납득안가는 사태인가.고위관료의 말꼬리를 잡고 냉소적인 자세를 갖자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이미 여러차례 이번 사태의 발생 이후 정부가 조사해서 어떻게 수서사건의 주역인 한보가 기간산업을 할 수 있었고,당시 정부

판단은 어떠했고,대출과정은 어떠해서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기를 요구했다.이는 한보로부터 정부관료가 뇌물을 받았느냐를 추궁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안의 중요성에 비춰 당연히 정부가 국민에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차후

재발방지대책을 제시하라는 상식적인 요구다.

그런데도 한창 수사가 진행될 때는 정부관료가 한결같이'나는 책임없소'만 반복하더니 이제 한보부도는 순전히 기업의 잘못이었다고 우기고 있다.안광구(安光구)통산부장관은 여당 의원들에게“철강산업은 86년 공업발전법 제정 이후 정부의 허

가사항이 아니라 민간자율로 바뀌었다”고 하다가 공격을 당했다.그러면 현대제철소는 왜 하지 말라고 간여했는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손바닥으로 하늘가리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5조원이 넘는 돈이 사업성이 아직 불투명한 공장에 투입됐고 앞으로도 2조원이 넘게 더 들어가야 하는 일을 정부가 모르고 있었고,책임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제일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조흥.외환및 산업은행의 경영기반이 온통

뒤흔들렸는데도 책임이 없다니 왜 정부가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기업과 은행이 잘못한 것이라면 왜 한보를 즉각 도산시키지 않고 정부는 계속 은행에 자금을 대라며 대출활동에 개입하고 있는지 韓부총리에게 묻고 싶다.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각료,그리고 청와대 경제수석은 당장 나란히 국민앞에 나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의문에 대해 설명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선 사과해야 한다.물론 전임자들에게 실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그렇다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

는 논리는 안 통한다.정부가 반성하지 않으면 다른 기업이 비슷하게 넘어질 때 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서로 다짐을 하자는 뜻이다.

첫째,당진공장의 공유수면 매립허가과정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뤄진 배경이 무엇인지,지반침하가 우려되는데 과연 매립공정을 제대로 감시했는지 밝혀야 한다.

둘째,대규모 공장에 적합치 않다는 코렉스공법을 도입하게 된 정책적 배경은 무엇이었고,경제성을 확신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셋째,한보에 대한 외화대출로 시작해 어떻게 2년새 3조2천억원이라는 엄청난 자금이 대출될 수 있었는지,은행감독원은 동일인여신한도를 피한 신탁대출이라는 편법을 왜 수수방관했는지 말해야 한다.

넷째,95년부터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가 어떻게 유원건설 등 10여개 업체를 인수할 수 있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다섯째,앞으로 한보철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원칙을 분명하게 밝히라는 것이다.국민기업화할 것이면 정부재정이나 특융을 통해 지원할 일이지 왜 이미 거액 부실대출에 물려있는 은행에 추가부담을 지우는지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고 전문가들 주장대로 경제성이 분명치 않으면 해산절차를 밟든가,혹은 다른 기업에 인수시키든가를 정해야 한다.그전에 먼저 객관적인 팀에 의한 정확한 사업성 조사결과가 밝혀져야 한다.

정부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이 국민의 눈에는 정부외의 다른 권력이 작용했다는 얘기로 비친다는 점을 정부 경제팀은 직시해야 한다.정부가 5조원이상이 대출되도록 사태의 엄중함을 몰랐다면 직무유기를 한 것으로밖에 해석이 안되는

데도 당장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세 때문에 모든 정부정책에 대한 믿음이 온통 흔들리고 있다.진정으로 정부가 처음부터 시장경제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애당초 한보사태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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