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이름] 내겐 옛 이름, 그에겐 첫사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어쩌다 미팅에 나갈 때 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옷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쁜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제 이름, 송필예가 싫었거든요. 개명 절차가 간단하게 바뀌자 바로 법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작명소에서 사주팔자 따져가면서 촌스럽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이름 송혜정이란 이름을 받아서였지요. 그 뒤 병원의 심사과에 취직했습니다. 병원 사람들은 제 옛 이름을 당연히 몰랐지요.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때였습니다. 누가 “야! 너 송필예 맞지?”라며 앞을 막아섰습니다. “네?” 했더니, “나 몰라?”라고 묻는 그 남자, 키 크고 잘생겼는데 기억에 없었습니다. 모르는 남자이니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지요.

그 짧은 순간 그 남자가 센스 있게 내 명찰을 확인하더군요. 그러더니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네요. 닮았는데 죄송합니다” 하며 가 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그 잘생긴 남자 얼굴이 어른거렸지만 도대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점심 시간에 그 남자가 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닙니까. “혹시요? 저기 언니나 동생 중에 송필예란 이름이 있나요? 제가 사람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거든요.”

“누구신데 그 사람을 찾아요?”

“알고 계시군요. 맞죠? 제 첫사랑입니다.”

“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첫사랑이라니, 처음에는 미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태성입니다. 필예를 아시면 꼭 한번 보고 싶으니 연락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오. 명함 여기 있습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이태성이란 이름을 되새겨 봤습니다. 번뜩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는 우리 집 맞은편에 살던 오빠였습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앞집에 살았던 삐쩍 마르고 여드름투성이였던 그 오빠가 틀림없었습니다.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송필예인데 태성 오빠 맞지요?”

“맞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연락처도 없고 해서….”

“나 시집 갔는데….”

“야, 나도 장가 갔어.”

“근데 오빠 키가 컸어? 언니가 그러는데 키가 크다던데, 오빠 별로 안 컸잖아.”

“어, 나 군대에서 많이 컸어. 하하.”

“한번 보자”

“아니~ 결혼도 했고. 그런데 정말 내가 첫사랑이야?”

“그럼, 가끔 와이프한테 첫사랑 이야기 하면 네 이야기해. 와이프가 그 이름 잊혀지지 않겠다고 하더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하하.”

오빠를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제 옛 이름과 여드름투성이 오빠는 이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송혜정 (34·인천시 서구 마전동)

다음 주제: 면접



■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주소·전화번호·직업·나이를 적어 12월 15일까지로 보내 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원고료를 드리며, 두 달마다 장원작 한 편을 뽑아 현대카드 프리비아에서 제공하는 상하이 왕복 항공권 및 호텔 2박 숙박권을 제공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