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국제수지적자 줄이기' 엄포성대책 안통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무역업자인 黃모(39)씨는 해외출장때마다 서울시내에 있는 면세점에서 미리 선물을 챙기는 사람이다.출장시 우선 쇼핑할 시간이 부족할 뿐더러 외국공항의 면세점이나 귀국행 비행기에서 면세품 사느라 법석떨기가 싫어서다.외국의 면세점보다 국

내면세점 것을 팔아줘야 달러를 조금 더 아끼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하지만 이같은'작은 애국심'은 얼마전 싱가포르 출장길에서'봉변'으로 보상받았다.국내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하면 여권에 거래내역이 기재되는데,이를'밀수처벌 기

록'으로 오해한 싱가포르의 입국심사원에게서 한동안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黃씨는 귀국하자마자 여권을 새로 교부받아 그'낙인'부터 지웠다.이후 선물도 남들처럼 외국면세점에서 사게됐다.

여권에 거래내역을 기재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국제수지적자를 줄이기위한 방안으로'내국인들이 무분별한 면세품 구입을 못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주자는'관세청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예상대로 면세점을 찾는 발길은 일단 줄었다.D면세점은 그 이전 월1백만달러에 달하던 내국인 매출액이 8월부터 무려 절반이나 떨어져 계속 50만달러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문제는 줄어든 수치만큼 실제로 달러유출이 줄어들 수

있느냐는 점이다.

면세점의 한 관계자는 홍콩의 춘절바겐세일기간동안 한국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린 사실을 예로 들면서“홍콩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면세품들은 똑같이 외제품인데도 홍콩은 정부까지 나서서 외국여행객을 끌어들이려 하고,우리정부는 국내서 사려는 사

람까지 외국에서 사라고 발로 차고 있다”고 말했다.무역수지적자를 줄인다는 원래 의도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달초 발표된“연2회이상 골프백을 들고나가는 여행자의 명단을 국세청에 통보한다”는 정책 또한 오히려 외국에서 비싼 돈주고 골프채를 빌려서 치게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B여행사 골프팀장인 金모(35)씨는“지난해초 이미 이와 비슷한

소문이 돌아서 지난해에는 골프채를 현지에서 빌리도록 권유했었다”며“업계의 추정대로 지난해 약 10만명이 골프채를 빌렸다고 보면 약 1천만달러(렌트비 30달러,3번플레이 기준)가까이가 정책 하나로 더 소비돼 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편법 해외유학생에 대한 송금을 금지키로 한 무역수지대책 차관회의의 결정도“이미 떠난 사람은 허용하고 앞으로만 금지한다”는 형평성문제와“실제 적발대상을 찾아낼 방법도, 단속할 방법도 없다”는 실효성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보내거나 받는 이들의 이름만 다른 사람으로 대신 이용하면 간단히 피해 갈 수 있을 뿐더러 송금대신 현지에 가서 직접 전달하면 그만이다.

S은행의 외환업무를 맡고 있는 崔모과장은“여권없이도 단순 소지목적만으로 2만달러까지 누구나 바꿀 수 있는 상황(96년7월부터)에서 정부가 계속 현실성없는 정책들을 내놓아 외환관리법을 스스로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다”며“이같은 엄포

성 정책들은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감만 계속 추락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이효준.정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