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노신영 前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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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에 항의하는 총파업,한보 대출비리 파동,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 망명….“톱뉴스는 한국에서”라는 외국언론의 지적을 뒷받침이라도 하는양 올들어 메가톤급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다른 사태.사건이 해결의 가닥도 잡지 못한 앞서의 것을 덮어 가면서.정신을 차리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만 하다.한국의 경제는 물론 정치권.국민의식의 기저까지 뒤흔든'한보태풍',한반도에 초긴장 상태를 몰고 온 黃비서 망명사건등을 지켜 보면서 많은 이들은 혼돈을 정리해주고 놀란 가슴을 보듬어 줄 국가원로를 아쉬워한다.5공 시절 외무장관.안기부장.국무총리를 지냈고 국정전반,특히 외교안보 분야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노신영(盧信永)롯데복지재단이사장을 본사 김현일(金玄鎰)정치부장대우가 만났다. [편집자註]

-'총리'께서는 외무장관.안기부장등 외교안보 분야 요직을 두루

거치셨는데 黃비서 망명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토머스 제퍼슨이 망명한 것과 같다'고 평했어요.제퍼슨이

누굽니까.미국 건국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사람 아닙니까.그만큼 전세계에

던진 충격이 굉장하다는 거지요.” -안기부장 재직 시절 상상할 수 있었던

일입니까.“지난해 2월 존 도이치 당시 미중앙정보국(CIA)국장이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에 대해 증언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그는 세가지를

말했어요. 북한정권의'붕괴'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는게

첫번째입니다.CIA 국장이 붕괴란 표현을 쓴건 처음이에요. 두번째는 북한

상황이 정치.경제적으로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겁니다.경제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정치상황까지 악화되고 있다고

말한 건 주목할 대목입니다.黃비서의 망명도 이 점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번째가 북한정권이 현재의 어려운 여건을 반전(反轉)시킬 능력은 거의

없다는 거지요.한마디로 북한이 오래 버틸 능력이 없다는 게 도이치

국장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95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리뷰지는 이런 분석을 했어요.'한.미

양국의 대북(對北)정책은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게

아니라 북한의 종말에서 오는 고통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黃비서 망명에서 도이치 국장의 증언이나 이

잡지의 분석이 현실화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과거 안기부장으로서

83년5월의 중국 민항기 송환 교섭도 지휘하셨는데 앞으로 黃비서

신병처리를 둘러싼 중국과의 교섭 전망은 어떻습니까.“그 때와는 경우가

다르지요.한.중간의 관계도 달라졌고(양국 수교) 黃비서 자신이 중국

지도층과 많은 친분을 갖고 있어요. 물론 중국과 북한은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맺은 가까운 사이입니다.관례를 존중하면서 남북한 양쪽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중국으로서는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문제일

겁니다.따라서 중국으로선 매우 신중하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

입장에서 黃비서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너무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는

인상을 줘서는 안됩니다.북한의 이론적 지주인 黃비서가 제 발로

한국대사관에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해답의 실마리는 다 풀린

거예요. 黃비서가 가진 정보가치에 너무 집착,그의 한국행을 지나치게

서둘러서는 안돼요.느긋하고 여유있는 자세로 중국과의 교섭에 임해야

합니다.언론도 이런 점에서 정부를 도와줘야 한다고 봅니다.” 中

입장고려 신중하게 -黃비서 망명사건과 관련해 북한이 보복테러를

하거나 한반도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이는데.“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지난해 잠수함 침투사건에서 보았듯 북한의 기본적인

대남(對南)전략은 바뀌지 않았어요.우리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도발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겁니다.이를

위해선 방위력을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북정책에 관한한 여야

구분없이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뤄야 합니다.

또 한번 설정한 대북정책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북한의 태도에 따라 이리저리 바꾸다 보면 북한이 우리를 우습게

볼 뿐만 아니라 우방들도 우리를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

권력층 주요 자리에도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黃비서 서신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과거 안기부장을 지낸 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나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곤 믿고 싶지 않습니다.” -黃비서 망명은 한반도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앞으로 우리의 대북정책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많은데.“동.서독과 우리의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덤비지 말고

국력을 배양하는 겁니다.경제력과 국방력,국민적 단합이 다

국력입니다.도저히 넘볼 수 없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거지요.이러한 힘이

계속 쌓이면 그 자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대북정책이라고 봅니다.”

-黃비서가 한국대사관에 도착해 썼다는 자술서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이상한 점은 혹시 없습니까.“黃비서가 어떤 생각으로

망명을 요청했는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평가를

유보하겠어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했다는 부분이나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黃비서가 최종적인 자유의사 확인 과정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너무 앞서서 속단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黃비서 송환교섭을 벌이고 있는 외무부등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어떤 것입니까.“결코 서두르거나 초조하게 굴지 말 것,중국

입장을 고려해 충분히 중국측과 협의할 것,앞으로 유사한 사태의 재발

가능성에 대비해 좋은 선례를 만든다는 심정으로 교섭에 임할 것등

세가지를 말하고 싶군요.”

-북한의 권력승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올 7월 승계설도 있지만 전망

자체가 다 추측에 불과합니다.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추측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어요. 미.소가 우리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한반도를 분단했듯 통일도 주변 4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한국이 경제적으로나 국방력에서 대단한 나라라는

인식을 주변국들에 심어주는 일입니다.

정치권도 다툼은 하되 대북문제에 관한한 당리당략을 떠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또'초강대국(super power)'인 미국과의 관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강화해야 합니다.아무리 해도 쐐기를 박을 구석이 없다는 것을

북한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요. 黃비서를 둘러싼 중국과의 이번

교섭은'정교한 성숙성(sophisticated maturity)'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미국이나 일본등 우방국들이'이제 한국도 이만큼 성숙했구나'하는

인식을 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거지요.

과거 북한문제를 다룰 때 나는 항상 김일성(金日成)주변에는 나보다

우수한 참모들이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일했어요.이번 일도 그들이라면

김정일(金正日)에게 어떤 조언을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대응해 나가야

할 걸로 봅니다.” 北.美관계 잘 굴러갈것 -黃비서 망명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는 계속 잘 굴러갈 것으로 봅니까.“북한 대외정책의 우선순위

1번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일본과도 수교함으로써 경제적 회생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은

북한내 강경파든 온건파든 다 똑같은 걸로 봅니다.

북한이 黃비서 망명이란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기술자까지 포함된

경수로 부지조사단에 비자를 내준다는 것은 바로 이런 판단 때문일

겁니다.黃비서 망명과 관계없이 북.미관계는 그대로 굴러가겠지요.”

-원로로서 한보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국내정치는 잘모르고

개입하고 싶지 않아요.(잠시 생각에 잠긴 뒤)그러나 나도 국민의

한사람이고 정부에도 있었던 만큼 의견이 없을 수 없지요.한보사건으로

국민이 허탈해하고 지도층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이 문제가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그러면 신뢰를 회복할 것입니다.'정부를 믿고 협조하면 앞으로

희망이 있겠구나'하는 것을 지도층이 제시해야 합니다.” -검찰수사가

사실상 종결됐는데요.“(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결되나요.”

-검찰수사에 대해'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실망스런 반응이

국민들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25일 대국민사과담화를 한다고 하니 좀더

기다려 봐야겠지요.너무 성급하게 걱정하지 맙시다.

-金대통령과는 인연이 있는가요.“거의 없는 편이지요.대통령 취임후 단

한번 북한문제 협의를 위해 청와대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한보사태로

인해 상처받은 국민감정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정부에서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물론 정부.여당의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으로 믿습니다.그만하면

되겠다는 선을 정부가 알 것입니다.좀더 기다려 봅시다.” -남한내에

5만여명의 친북세력이 있다는 黃비서의 언급과 관련해 '신공안정국이

오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우리국민들도 깨었습니다.1년에 대학생이 25만명씩 쏟아져

나옵니다.사태를 호도하고 초점을 흐리려고 해도 하루가 다르게

국민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게는 안될 것입니다.” 공직자

책임감.긍지갖길 -한보사태를 보면서 후배 관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텐데요.“공무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책임감과

프라이드입니다.특히 국장이상의 고위직 공무원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총리로 있을 때 경찰.구청직원의 사소한 비리는 불문에

부쳤습니다.

예컨대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저지른 부정 같은 것이지요.그러나

국장이상이 되면 뇌물을 받는 일이 용납되지 않습니다.늘 국가이익을

생각하면서 자기자신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지금 정부에 계셨다면

한보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총리였던 그는 사건 규명 과정과 관계기관의 은폐.정부의 대책수립.마무리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그는 정부 스스로 진상을 알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이를 주도한 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물러났던

당시를 회고했다).('책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물러난

닉슨 미대통령에게서 문제가 됐던 것은 도청보다도 도청사실을 숨기려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나는 당시 권력핵심에 있던 인사들에게 이같은

교훈을 들려주며 설득했습니다.”〈정리=배명복.이하경 기자,사진 박순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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