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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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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본 혼슈의 서쪽 끝 항구인 시모노세키는 간몬 해협을 두고 규슈와 마주 보고 있다. 바다 밑으로 터널이 뚫려 걸어서도 10분이면 건널 만큼 좁은 이 해협으로 하루 700척의 배가 지나간다.

1863년 5월 간몬 해협을 항해하던 미국 상선을 향해 육중한 청동 대포가 불을 뿜었다. 시모노세키가 속한 조슈(長州)번이 서양 오랑캐를 쫓아낸다며 일으킨 전쟁이었다. 무모함의 대가는 혹독했다. 응징에 나선 4개국 연합함대(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의 화력에 조슈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열강 4개국은 배상금 300만 달러와 함께 조슈번이 갖고 있던 청동 대포 100여 문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이 전쟁을 계기로 서구 문물의 힘을 비로소 깨달은 조슈는 양이(攘夷)에서 개국으로 급선회하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됐다.

빼앗긴 조슈 대포 가운데 하나가 일본에 반환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기자 출신의 역사소설가 후루카와 가오루가 파리 군사박물관에서 조슈포를 발견하고 반환운동을 벌이자 시모노세키 출신의 아베 신타로 외상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다. 프랑스는 “전리품은 돌려줄 의무가 없다”고 버텼다. 상당 기간 지연되던 협상은 ‘상호 임대 방식’에 합의함에 따라 극적으로 타결됐다. 일본은 조슈 대포를 돌려받는 대신 옛 영주의 갑옷 한 벌을 프랑스에 대여해 주었다. 계약은 2년마다 자동 연장되도록 해 실질적으론 영구임대가 됐다. 132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 대포는 시모노세키의 박물관에 자리를 잡았고, 똑같이 만든 모조품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던 ‘그때 그 자리’에서 간몬 해협의 도도한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이미 독자들은 조슈포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를 눈치챘을 것이다. 1866년 신미양요 때 프랑스 군인이 빼앗아 간 외규장각 의궤와 절묘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지난주 유네스코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문화재 반환 국제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약탈 문화재는 반환해야 한다”는 한국 대표에게 프랑스 대표는 “국유 재산은 양도가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하지만 조슈포의 사례는 반환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얼마나 끈질기게 설득하고 협상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벌써 반환협상을 시작한 지 15년이 흘렀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