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눈물과 땀방울의 결실 -‘와인 미러클’(랜달 밀러·2008)의 ‘샤토 몬텔레나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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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대부분이 물이다. 그 다음으로 높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것이 알코올이며, 포도의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글리세롤이 셋째를 차지한다. 이것이 양조학자의 대답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

천지인(天地人)의 오묘한 조화로 태어나는 와인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와인은 피눈물과 땀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영화 ‘와인 미러클’이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가슴 벅찬 메시지다. 86호(중앙SUNDAY 2008년 11월 2일자)에 이어 ‘와인 미러클’을 한 번 더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요 무대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자리 잡고 있는 무명의 와이너리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이 샤토의 주인인 짐(빌 풀먼)은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쩔쩔매면서도 오직 ‘최고의 와인’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자존심 강한 사내다. 그에게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무책임한 히피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아들 보(크리스 파인)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들 부자간의 권투 대결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얻어터지며 신경질적으로 항변한다. “래킹을 또 하라고요? 벌써 네 번이나 했잖아요! 세계신기록을 세울 작정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래킹(Racking)이란 찌꺼기 분리 작업을 뜻한다. 발효가 막 끝난 와인에는 효모의 찌꺼기가 많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가라앉힌 다음 위쪽 맑은 부분만 채취하여 따로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세심한 정성과 엄청난 노동량을 요구하는 일인데 고급 와인일수록 래킹의 횟수가 많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펀치를 날리며 못을 박는다. “끝없이 계속해야 돼. 최고가 될 때까지!”

영화는 최고의 양조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 샤토에 취직하러 온 샘(레이철 테일러)이 등장하면서부터 묘한 삼각관계를 보여 준다. 놀라운 테이스팅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구스타보(프레디 로드리게스)와 보가 샘을 동시에 연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짐은 샘을 데리고 포도밭 사이를 거닐며 자신만의 와인 철학을 전수해 준다.

“자네, 포도밭에 뿌리는 최고의 비료가 뭔지 아나?” 히피풍의 신참내기 아가씨 샘이 알 리가 없다. 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바로 주인의 발품이야.”
포도나무를 심어 놓기만 하면 와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의 줄기와 잎, 그리고 열매가 매달려 있는 부분을 캐노피(Canopy)라고 부르는데, 포도 재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캐노피 매니지먼트다.

간단히 말해 가지를 쳐내고 잎사귀층을 조절해 줌으로써 햇볕과 바람이 포도 열매에 닿는 방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게으른 주인이 가꾸는 포도밭은 캐노피가 무성하다. 그리고 캐노피의 두께와 와인의 품질은 반비례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짐의 말마따나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주인”만이 좋은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바로 그들의 땀방울인 것이다.

그렇게 온갖 노고 끝에 만들어 낸 화이트와인 ‘샤토 몬텔레나 1973’은 그러나 병입 후 ‘일시적 변색 현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짐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올해 농사는 망쳤다. 은행 대출금을 갚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파산 신고를 하는 수밖에. 영화 속의 짐은 변색한 와인들 사이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쳤어. 나는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 최선을 다한 인간의 피눈물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영화 ‘와인 미러클에서 가장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이다.

한낱 히피에 불과한 줄 알았던 아들 보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순간 이후부터다. 그가 샘의 손목을 낚아채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 프레즈노(Fresno) 캠퍼스와 더불어 미국 와인 양조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현재 프랑스의 보르도대를 제치고 세계 양조학의 메카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그곳의 양조학 교수는 보가 들이댄 샤토 몬텔레나 1973을 한참 들여다보고 시음하더니 탄성을 내지른다. “맙소사, 책에서만 봤던 바로 그 현상이로군! 걱정할 것 없어.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조만간 다시 제 색깔을 되찾게 될 거야!”

UC 데이비스의 양조학 교수조차 “책에서만 봤다”고 고백한 이 일시적 변색 현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마치 보가 UC 데이비스로 달려가듯, 한국와인아카데미의 김준철 원장에게로 달려갔다. “아마도 적변(pinking) 현상을 말하는 것 같군.” 나의 와인 스승이신 김준철 원장의 답변이다. 화이트와인 양조 시 공기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차단하면 안정화 과정이나 주병 중 갑자기 산화되어 일시적으로 회색빛 띤 핑크빛으로 변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현상을 적변이라고 한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답변은 영화 속에 있다. 짐이 오직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양조 과정에서 ‘거의 완벽하게 공기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와인 양조학에서 공기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접촉을 줄이는 것이 좋으나 지나치게 차단하면 오히려 이런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한글판 제목(원제는 ‘보틀 쇼크’)처럼 ‘미러클’이 벌어질 때다. 보는 짐이 폐기 처분한 줄 알았던 와인을 용케도 구해 낸다. 그리고 영국인 와인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에(앨런 릭맨)를 통하여 자신들의 피눈물과 땀방울로 빚어 낸 이 와인을 ‘파리의 심판’에 출전시키는 것이다.

놀랍게도 ‘샤토 몬텔레나 1973’이 프랑스 부르곤을 대표하는 그 놀라운 샤르도네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역사 속의 실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답변은 자명하다. 와인은 전통과 명성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피눈물과 땀방울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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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씨는 『심산의 와인예찬』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등을 썼고,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과 와지트(www.wagit.co.kr)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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