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淸論>'한보사건' 읽는 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금융인의 눈으로 보면 기업은 언젠가 소멸한다.큰 기업은 크게,작은 기업은 작게 파문을 일으키며 사라진다.경영을 대물림하며오래 존속하는 기업은 예외적이다.수많은 저축자의 돈을 모아 관리하는 금융인은 위험기피적이어야 정상적이다. 기업인의 관점은 대조적이다.다른 기업은 모두 망해도 내기업은예외라고 믿는다.차입규모가 적으면 기업운명이 은행의 처분에 좌우되지만,빚이 일정규모 이상 불어나면 오히려 기업이 은행을 요리할 수 있다.빚갚기가 어려운 고비마다 그럴싸한 신규사업을 벌이거나 그러는 척하며 부채규모를 갑절로 늘리는 자전거타기가 최선의 안전책이다.이같은 기업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위험선호적이다. .한보'사건으로 불거진 우리 사회의 문제는 회사를 파산의벼랑끝으로 몰아 은행을 농락하는 기업인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금융인의 자세가 너무나 허술하다는 점이다.왜 그럴까. 우리 사회처럼 모든 일에 정치권의 입김이 강한 풍토에서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권력층의 영향력이다.실제로 권력층과 줄을 대고 있거나 그런척 허세를 부리는 것이 벼랑끝 기업인의 공통된 특징이다..한보'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 다.앞으로 사직당국이 규명하겠지만 아마도 상하좌우로 고구마 넝쿨처럼 얽히고 설켜 있을 것이라고 한다.이같은 외부압력이 사실이더라도 금융인이 버티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금융인의 물욕 탓도 있겠지만 은행경영진의 자리가 외압에 굴종해야 유지된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결국 해결책은 금융기관책임경영제 확립에 있다.이래서.은행주인 찾아주기'가 해법으로 거론되는데 경제력집중과 이해상 충 문제가 걸림돌이다.따라서 금융만을 업으로 하는 자본,또는 기업의 육성필요론이 제기된다.한편.신한'.하나'은행처럼 대주주 없이 책임경영이 가능한 우량은행이 또 하나의 길잡이가 된다. 오늘날 금융은 정보로 승부하는 산업이다.세계 어느 나라에도 은행과 기업간에는 정보의 양적.질적 차이가 존재한다.한국의 경우 기업이 제시하는 사업계획.재무제표등 자료의 신뢰성이 낮고 자금규모가 클수록 약속대로 상환할 의사가 두드러 지게 떨어지는상황에서 은행대출이 이뤄진다.따라서 대출은 담보위주로 되고 여신심사 기능은 미발달상태에 머무른다.은행의 대기업 선호.중소기업 기피 성향은 정보의 비대칭 문제,여신심사 기능 미성숙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실하 게 신용을 축적해온 중소기업이 많지 않다는데 원인이 있다. .한보'그룹의 경우 파산의 빌미가 향후 국민경제 기여도가 높을 수도 있는 철강업 설비투자인 점을 고려해 은행의 자금지원 지속을 아쉽게 볼 수도 있다.그러나 업종이 무엇이든 기업이 자체 재무능력을 초과한 규모의 사업을 벌인 경우 반드 시 유동성위험에 노출되며 은행의 대출능력은 유한하다. 한국의 경우 거인기업을 난쟁이 은행이 지원하고 있는 꼴이다.은행이 모두 난쟁이인 까닭은 지난날 개발연대에 기업을 키워준 지나친 젖물림 때문이다. .한보'사건은 세기말적 대사건이다.금융산업이 이용자 편익을 위해 탈바꿈해야 한다.그러나 일부기업이 여전히 벼랑끝 놀이를 즐기는 상황에서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내맡기는 방식의 금융개혁은 금물이다. 〈서강大 경상대 교수〉 김병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