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의료산업은 브랜드 전쟁 중…삼성·LG 같은 회사 나와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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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기업체 바이메드의 김진하(55) 대표는 요즘 인수합병(M&A) 시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쓸 만한 기업을 M&A해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다. 국내 의료기기업체 수는 1700여 개. 수적으로는 꽤 되지만 대부분 영세기업이다. 국내 의료기기 시장 규모가 세계 시장의 1~2%에 불과한 상황이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기업을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업체 중에서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출을 하려 해도 규모나 브랜드가 받쳐주지 않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기사업은 갈수록 브랜드 신뢰도가 중요해지고 있다. 국내 병원만 해도 GE·지멘스 같은 해외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런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지난해 귀국해 국내 의료기기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2006년까지만 해도 지멘스 본사 소속 부사장으로 근무했었다.

“한국 의료산업의 인적 자원은 세계적 수준입니다. 기술이 우수하고 부지런하고 일을 잘합니다. 디자인 능력도 뛰어납니다. 문제는 마케팅 능력과 글로벌 네트워크입니다. 세계 소비자들이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는 20년간 지멘스에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인맥을 활용해 한국의 의료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KAIST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포스닥 과정을 마쳤다. 1986년 지멘스 미국법인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승승장구해 2001년 CTO로 승진했다.

글로벌 기업의 CTO에 오른 비결을 묻자 “돈을 따르기보다 일을 좇았던 결과”라고 답했다. “처음 지멘스에 들어갔을 땐 영어 서툰 이방인으로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했었죠. 포스닥 과정까지 마쳤는데도 연봉이 형편없었어요. 하지만 돈이나 직함보다 일의 성과로 승부했고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돈을 좇으면 돈은 도망가지만 일을 따라 매진하다 보면 돈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우받는 걸 너무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는 CTO로 재직하면서 지멘스가 R&D 센터를 한국에 설립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2년 지멘스가 미국 R&D 센터 일부를 한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초음파 기기는 제 소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일부 미국 직원 사이에서 ‘한국인 사장이 자기 나라에 투자하려고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반발했고 제 자동차에 계란을 던지기도 했어요. 아내는 밤에는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걱정하곤 했죠.”

이런 위협을 무릅쓰고 그가 R&D 센터의 한국행 결정을 내렸던 것은 비단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의 경쟁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일하던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2년 지멘스의 메디슨 인수 시도 덕분이었다. 8개월에 걸쳐 협상했지만 인수는 무산됐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한국식 재무제표를 지멘스 본사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그는 메디슨 인수 협상 과정에서 한국 의료산업의 잠재력을 알게 됐고, 그후 지멘스의 초음파 R&D 센터를 경기도 분당에 설립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미국에서 5년 걸릴 것을 한국에서는 2년 반 만에 만들어 냅니다. 독일 지멘스 본사도 깜짝 놀랄 성과였죠. 제가 떠난 뒤에도 지멘스는 한국 투자를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경북 포항 공장도 증설했습니다. 미국 초음파 관련 사업부 대부분이 한국으로 이전한 셈입니다.”

그는 2006년 지멘스의 아시아 지역 비즈니스 책임자로 발령받았지만 포기하고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의 낙후한 의료기기 산업을 일으키는 데 작으나마 역할을 해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 대표의 꿈은 기술력을 갖춘 국내 중소 의료회사들을 모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해 일진그룹의 투자를 받아 설립한 바이메드가 대기업 도약을 위한 발판이다. 바이메드는 현재 초음파 의료장비 개발을 진행 중이다. 그는 지멘스 근무 시절 같이 일하던 인재들을 영입하고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면서 M&A 작업도 함께하고 있다.

김 대표는 현재 지식경제부 기술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전자 집약적인 기술을 기반으로한 의료기기 분야만큼은 한국의 경쟁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범용성 있고 시장성이 검증된 초음파나 X선 장치 등에서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는 것이다. 2002년 지멘스가 메디슨 인수 협상을 벌일 당시 메디슨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던 중국 민드레이가 지금은 회사가치 4조원의 글로벌 의료회사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한국에서도 민드레이 같은 회사가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안타까워서다.

“의료기기사업은 미래 성장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평균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만성질환도 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의료기기 개발은 오랜 시간과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너무 늦으면 세계 시장에서 도태됩니다. 하루빨리 한국의 의료기기업계에서도 삼성이나 LG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나와야 합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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