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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 소비의 祝辭인가 代案의 학문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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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이소의 장편소설 ‘거울보는 여자’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의 직업은 문화평론가다.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이 소설에서 여상 출신의 의상실 판매원인 ‘나’는 돈많고 유식한 문화평론가 ‘그’를 설악산 휴가길에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동거를 시작한다. 그가 하는 이야기 속에는 유명 가수나 탤런트, 그리고 영화제목이 등장한다. 나는 그의 말이 재미있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때가 많다.

마침내 소설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한 문화평론가는 가장 90년대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다. 일간 신문에서도 그런 직업을 가진 필자들이 이제는 자주 등장한다. 대부분의 문화평론가들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돈이 많지는 않지만 남달리 유식한 것은 분명하다.

고전적 지식인의 유식함과 다른 점은 그들이 문학과 철학이 아니라 TV드라마나 가요,심지어 에어로빅과 햄버거 또는 롯데월드를 논한다는 것이다. 너무 친근하고 일상적이어서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모두 사유의 대상이 된다. 소재는 가볍지만 그러나 논의는 무겁다. 시뮬라크라, 상상계와 상징계,의미 작용,상호 텍스트성등 버거운 단어들이 여기저기 등장해 가벼운 읽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희작의 만화 ‘서울 손자병법’은 ‘주인공의 합리적 기획이 실패하는 착란과 도착의 세계’며,‘모래시계’는 ‘억압의 동학과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플롯’으로 파악된다. 경마장은 ‘우연성과 비합리성이 질주하지만 합리성의 강박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며 컴퓨터는 ‘텍스트와 인터텍스트로 구성된 체계’다.

단순화하면 문화평론가들의 전공이 ‘문화연구’다. 물론 아직 이런 학과는 한국 대학에 없지만 90년대의 ‘대중문화 르네상스’에 힙입어 대안적 학문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평론가들이 부쩍 늘었다는 사실 말고도 최근 인문·사회분야의 출판경향을 보면 문화연구는 이미 80년대의 진보적 사회과학을 대체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직접 다룬 단행본들만 해도 최근 2,3년동안 30~40여종이 출간됐다. 여기에 문화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푸코·라캉·데리다·들뢰즈·에코등의 저서와 연구서를 합치면 1백여종이 넘는다. 대중문화 비평지로 분류되는 ‘문화과학’ ‘오늘예감’ ‘상상’ ‘리뷰’등의 계간지들은 일찌감치 문화연구적 접근을 대폭 수용해왔고,96년엔 월간지인 ‘이매진’,무크지 ‘이다’와 인터넷 잡지 ‘스키조’도 가세해 국내외 문화연구의 성과를 전파하고 있다.

각 대학의 대학원에는 신문방송학과·사회학과를 중심으로 문화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서울대 신문학과 대학원 양은경(박사과정)씨는 “2~3년 전부터 매년 3~4명 정도가 문화연구를 전공으로 택해왔다”고 말한다. 지난해만 해도 컴퓨터 게임·열린 음악회·PC통신등을 주제로 한 석사학위 논문이 제출됐다고 한다. 이미 김성기·김종엽씨등 박사 문화평론가를 배출한 서울대 사회학과의 박사과정에는 5명의 문화연구 전공자들이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사설 학교인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도 95년부터 시·소설·영화등과 나란히 3개월 코스의 문화비평 강좌를 마련해 벌써 8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출판·저널리즘·소장 학술계에서 문화연구는 이제 가장 촉망받는 분야의 하나가 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열린 한국사회학대회는 이같은 흐름을 반영하듯 문화분과를 최초로 개설해 최근 문화연구의 성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문화’는 문학·미술등의 소위 고급문화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대중문화인 대중의 일상 전체를 품는 개념이다. 문화연구의 본토는 영국이다. 엘리트주의적인 영국의 문학연구 전통은 연구대상인 고급문학을 ‘작가의 심오한 주제의식이 감춰진 통일적인 텍스트’로 전제해왔다. 그러나 레이먼드 윌리엄스등 선구자들은 “본래 통일성을 갖추고 절대적 의미를 지닌 텍스트는 없으며 의미는 독자와 텍스트가 상호 작용할 때 비로소 생성된다”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작가·텍스트의 절대성과 독자의 수동성이 모두 부정된 것이다.

이 도전적 문제의식은 대중소설·영화등의 대중적 서사(敍事)로 연구대상을 옮겨가게 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되면서 연구대상은 패션·소비 일반등 비(非)서사적 일상 전반으로 확대돼갔다. 장난감에서 지하철까지 의미작용이 일어나는 모든 것에 텍스트의 자격이 부여된 셈이다. 의미의 해석을 위해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기호학·정신분석학을 주축으로 현대의 각종 인문학이 동원됐다. 폭과 깊이를 동시에 요구받는 문화연구의 대상과 방법론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세련돼왔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90년대의 정치적 관심 퇴조, 영화·대중음악등 좁은 의미의 대중문화와 소비·레저·성(性)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가파른 증대가 문화연구 붐의 토대가 됐다. 여기에 서구에서 만개한 문화연구 성과가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전통적 학문이 전혀 돌보지 않거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중의 무의미해보이는 일상에서 적극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문화연구는 오늘의 인기 학문이 될 수 있었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연구자들도 문화연구의 성과를 적극 받아들여 일상 속에 감춰진 성차별을 해독해내고 있다. 연세대 조혜정 교수가 이끄는 ‘또 하나의 문화’동인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기성학계는 ‘경박한’ 소재를 다루는 문화연구를 아직 외면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온갖 분과학문을 쉴새없이 넘나드는 문화연구 특유의 속성에 있다. 이 학제성(學際性) 때문에 기존의 협소한 분과체계로는 문화연구를 품을 수 없는 것이다. ‘문화과학’ 편집인 강내희(중앙대)교수는 “이 점이 바로 문화연구의 진보성”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인문학 발전을 지체시켜온 분과체계의 권위주의와 배타성에 대한 반군 역할이 문화연구의 보이지 않는 사명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편에 선 해석자 또는 기성학문에 대한 반군이라는 임무를 짊어진 한국 문화연구는 그러나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음을 연구자들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김성기씨는 “최근의 많은 문화평론들이 소비행위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주례사에 그치고 있다”고 우려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제조해내는 스타 시스템은 외면하고 그의 이미지에 현학적 수사를 봉헌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신현준씨는 “개별 장르에 대한 이해와 방법론에 대한 천착없이 각종 분야를 넘나드는 바람에 공허한 수사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했다. 강내희 교수는 이를 2종경기에도 서툰 사람이 10종경기에 나서는 꼴에 비유했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문화연구의 비판성 회복’이다.

서울대 박사과정의 김수진씨는 이렇게 진단한다. “최근의 가벼운 문화평론 범람은 일부 저널리즘의 문제일 뿐이다. 그동안이 외국이론 소개와 초보적 응용 단계였다면 이제는 자생적인 성과를 내놓기 위해 연구에 충실할 때다. 문화연구의 학문적 가능성은 무한하다”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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