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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출제팀 동행 취재 … “논술, 만화영화까지 참고해 출제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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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13일 오후 6시 한양대 이재복(42·한국언어문학과) 교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경준(50·수학과) 입학처장이었다. 차 처장은 “수시 논술고사 출제위원으로 선정됐다”고 통보했다. 이 교수는 퇴근 후 여행 가방에 짐을 쌌다. 다음날부터 논술고사가 치러지는 23일까지 모처에 ‘감금’돼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는 조교에게 “급한 학회 일정이 생겨 출장을 가게 됐으니 학생들에게 휴강 소식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23일 오후 3시30분 출제를 마친 한양대 박상천 출제위원장(맨 앞)과 교수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에 있는 출제 장소를 나오고 있다. 오른쪽 셔터가 내려져 있는 곳이 창문이다. 교수들은 열흘간 이곳에 갇혀 생활했다. [정선언 기자]


한양대뿐 아니라 각 대학은 이처럼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논술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14일 오후 1시 한양대 입학처장실엔 이재복 교수를 포함한 출제위원 15명이 모였다. 각 과 학과장들이 추천한 교수 중 입학처장이 고른 이들이다. 인문계 논술은 이 교수와 정치외교학·신문방송학 전공 교수 등 4명이 선정됐다. 자연계 논술은 응용수학·재료화학공학·수학 전공 교수 등이 맡았다. 차 처장은 “본고사형 문제를 출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 교수가 “본고사형 문제가 뭐냐”고 물었다. 차 처장은 “지금까지 본고사 성격이 있다고 지적당한 문제를 참고하고, 정답이 없되 종합적 사고를 평가할 수 있는 문제 정도로 이해해 달라”고 답했다.

교수들을 태운 버스는 오후 3시30분쯤 남양주시 퇴계원 인근의 한 농장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교수들은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100여 평 규모의 건물에는 2~4명이 함께 쓸 수 있는 방 8개와 세탁기가 갖춰진 공용 화장실, 회의실 등이 있다.

출제위원들은 건물 뒤편 식당에서 정해진 시간에 모두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운동도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인문계 논술 출제를 맡은 교수들은 14~15일 이틀간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정체성’ ‘예술’ 등의 주제를 정했다. 16일부터는 문제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됐다. 예술 분야를 담당한 이재복 교수는 서가가 딸린 회의실에 박혀 지냈다. 서가에는 모든 고등학교 교과서와 주요 문제집, 대학 교재로 쓰이는 각종 사회과학서적, 수학·과학 원서 등이 준비돼 있었다. 문화 관련 잡지와 ‘행복한 눈물’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의 도록, 이원복 교수의 만화책, 영화 테이프도 있었다. 출제위원들은 한 대뿐인 유선전화로 입학처에 필요한 책을 주문할 수 있다. 인터넷은 공정위원과 출제위원장이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에만 쓸 수 있다.

이 교수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문예이론』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미국 미학자 멜빈 레이더의 『예술과 인간가치』, 영국 미학자 콜링우드의 『상상과 표현』에서 2개의 지문을 뽑았다.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장정일의 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을 추가로 골랐다. 문제는 ‘2개의 지문에서 설명하는 관점 중 하나를 택해 장정일의 시를 해석하라’였다.

정체성 문제를 낸 교수는 영화 ‘존 말코비치되기’를 보고 그 내용을 요약해 지문으로 썼다.

상경계 수학 논술을 맡은 김성욱(44·응용수학과) 교수는 수학 교과서만 참고했다. 최근 금융발 경제위기 상황을 반영해 현재 은행 각 지점의 부실 대출 평균이 은행이 기존에 발표한 부실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3개 은행을 비교하는 문제를 냈다.

최종 문제를 결정한 교수들은 교과서와 문제집 등을 보며 유사 지문이나 문제가 있는지를 점검했다. 이 과정까지 통과한 문제가 인쇄에 들어간 뒤엔 예시 답안과 채점기준표를 작성했다.

23일 가장 늦게 시작한 자연계 논술이 치러지던 오후 3시30분 교수들은 열흘간 갇혀 지낸 농장 밖으로 나왔다. 한 교수는 “출제위원이 되는 건 마치 피할 수 없는 성배(聖杯)를 마시는 것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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