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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대한 추억을 거슬러 오르면 한 인간이 얼추 어느 연배, 어떤 취향에 속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년 12달이 한 장에 빼곡 인쇄돼 있던 양조장 달력을 기억한다면 나이 지긋한 장년일 것이고, 바닷가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줄줄이 이어지는 주류회사 달력을 좋아한다면 애주가라 보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날짜를 확인하는 생활필수품으로서의 달력의 효용은 예전만 못해졌지만 고급스러운 명화(名畵)나 멋진 사진을 아트지에 특수 인쇄한 이른바 VIP용 달력은 오리지널 못지않게 집 안 장식품으로 인기를 모은다. 업그레이드된 오늘의 달력으로 2009년을 미리 찾아간다. 사진 신인섭 기자, 자료 협조 아름지기·아트센터나비·리테일미디어솔루션·연미술

벽에 거는 명화 열두 장 - 아트 달력의 세계
“삶의 기복이 늘 달력의 날짜에 맞춰 오는 건 아니라”(나희덕, ‘도끼를 위한 달’ 부분)는 거야 진작에 아는 바지만, 그래도 달력 없는 열두 달은 상상하기 어렵다. 각종 경조사도 표시해야 하고, 공휴일·음력 절기도 따져야 한다. 액자·족자 걸기가 마땅치 않을 땐 깔끔한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한다. “은행 달력을 맨 먼저 걸어야 집에 돈이 든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폼 나는 아트 달력을 찾게 되는 이유다.
명화 달력 애호가들 사이에서 소문난 신세계 달력은 내년 주인공으로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1901~85)를 골랐다. 2008년 12월을 포함해 13개월 13점엔 지난해 11월 초부터 올 1월 말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때도 소개되지 않은 대표작까지 담긴 것으로 알려진다.

신세계·삼성·SK 컬렉터 생길 정도
신세계가 명화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93년도 ‘권옥연 달력’부터다. 반응이 좋자 98년도 피카소 달력부터는 VIP 달력을 따로 제작해 왔다. 색감·질감이 뛰어난 VIP 달력은 수천 부만 한정 제작해 임직원이나 상위 고객 선물용으로 돌린다. 르네 마그리트(2000)·앙리 마티스(2004)·구스타프 클림트(2007)·로이 리히텐슈타인(2008) 등 유명 근·현대 작가를 망라해 온 신세계 달력은 컬렉터가 생겨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

‘VIP 명화 달력’의 대표 격은 삼성 그룹이다. 임직원, 협력사 관계자, 주요 고객 등에게 선물용으로 96년 ‘마티스 달력’을 4000여 부 찍은 게 시작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점차 물량을 늘려 현재는 4만~5만 부 찍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흐·샤갈 등 유명 해외 화가에다 천경자(2008) 등 국내 작가도 가세하면서 현재는 VIP용이라기보다 ‘명화 캘린더’ 이미지가 더 강하다. 2009년도엔 미국 현대 화가 엘즈워스 켈리를 소개할 예정이다.

SK그룹도 빠질 수 없다. 박경리의 토지(2003)·박완서(2004)·조정래의 태백산맥(2005) 등 국내 문화인물 위주의 테마 달력을 제작해 온 SK는 특히 민화를 소재로 한 2008년도 VIP 달력이 제59회 일본 캘린더 전시회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9년도엔 한국 서예 2000년을 주제로 한 벽걸이형과 백자 장군병을 소재로 한 오브제형 캘린더 2종을 VIP용으로 별도 제작한다.이 밖에 우리은행·국민은행·농협 등도 VIP용 달력을 따로 제작해 돌린다. 하지만 알려지면 너도나도 달라고 하기에 일부 회사는 VIP용이 따로 있다는 걸 숨기고 싶어한다.

고급지 인쇄, 일반용보다 몇 갑절 비싸
‘명화 달력=VIP 달력’으로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둘 사이엔 교집합이 존재할 뿐이다. 신세계 2009년 달력은 일반·VIP용 구분 없이 화가 장 뒤뷔페가 주인공이다. 다만 VIP 달력은 일반 용지보다 4~5배 이상 비싼 고급 판화지(아르쉬)를 사용하고 색감도 훨씬 원화에 가깝다. 일반이 4~6도 인쇄에 그치는 반면 VIP용은 적게는 20가지, 많게는 40가지 컬러를 특수 오프셋 인쇄로 찍어내기 때문이다. 이 밖에 바인딩·엠보싱·금박 처리 등 세세한 데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일본에선 한 귀금속 회사가 시가 2억원 이상의 황금 달력을 매년 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업 입장에선 불특정 다수에게 홍보하느냐(일반용), 차별화한 고객에 맞게 소수만 발행하느냐(VIP용)의 차이다. 1년 내내 안방 홍보를 할 요량으로 뿌린 달력이 벽에 걸리지도 못하고 버려지면 손해다. 업계도 ‘양보다 질’ 쪽으로 기울면서 수량을 적게 하되 고급스레 만드는 추세다. 신세계 달력을 제작하는 ‘리테일미디어솔루션’의 박영준 대표는 “90년대 이후 문화 안목이 높아지면서 명화 달력의 선호도가 커졌다”며 “기업도 브랜드 홍보보다 명화 달력 속에 고품격 이미지를 전달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달력에 쓰이는 작품에 대해선 저작권료가 지불된다. 아직까진 해외 작가 선호도가 큰 편이다. 국내 중견 작가들의 경우 열두 달을 변화무쌍하게 표현할 만큼 작품세계가 다양하지 않은 것도 이유다. 미술 시장이 호황을 이루면서 턱없이 높은 저작권료를 부르는 경우도 있어 제작사가 꺼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ING 생명 같은 경우 기업 메세나의 일환으로 3년 전부터 꾸준히 국내 중견 작가 작품으로 ‘4인4색’ 시리즈를 하고 있다.

공짜 배포 보편화…요즘은 탁상용 강세
최근 출간된 『양반의 사생활』(하영휘 지음, 푸른역사)에는 제자·친지들에게 한 해 30~40건의 역(曆·달력)을 선물하는 데 곤경을 겪는 19세기 선비 조병덕이 그려진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달력은 내로라하는 집안 사이에 오가는 귀한 선물이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인쇄물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서 물품 광고를 위해 달력을 공짜로 나눠주는 게 보편화됐다. 60~70년대엔 정치인들이 홍보용 달력을 마구 뿌리기도 했다. 덕분에 현재까지도 달력은 공짜라는 인식이 뿌리 깊어 국내에선 판매용 달력 시장이 극히 제한적이다.

국내 연간 달력 시장 규모는 5000억원 내외로 추정된다. 기업 연말 인쇄물 예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게 달력 제작인지라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례 없는 불황을 겪고 있는 올해도 중소기업의 달력 제작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한때는 달력을 몇 개 받았나 하는 데서 사회적 위신을 증명받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선 그런 분위기도 많이 줄었다. 벽걸이 TV와 액자 사진 등이 벽을 차지하면서 달력이 들어설 공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벽걸이보다 탁상용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선호도가 높다.

한 TV 광고를 빌려 말하자면 옛날엔 임금님만 보셨다는 달력을 책상마다 두는 형편이니, 임금님도 안 부러울 지경이다. 오히려 ‘공짜 달력’에 목매는 게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니, 달력 100년사 속에 세상 인심도 많이 변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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