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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레즈비언, 여성으로 동성애자로 ‘이중의 차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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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12면

다큐멘터리 ‘이반검열 1’(2005)의 한 장면. 동성애자인 10대 여중생 두 명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과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주제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여성영상집단 ‘움’ 제공

#“집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시고, 가족 모두가 벌레 보듯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나가고 싶지만…”

얼마 전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 20대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은 가정 불화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상담소 대표 현박정원씨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직업 군에 있다”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정 내 갈등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동거 중인 파트너가 응급 수술을 받게 돼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레즈비언 A씨(28)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할 수 없었다. ‘가족’임을 반복해 설명하는 A씨에게 병원 측은 “가족을 부르든지, 보증금으로 100만원을 내야만 수술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정규직인 A씨는 수중에 돈이 없었다. 결국 게이(남성 동성애자)인 친구를 불러 “남편”이라고 둘러댄 다음에야 파트너는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상황은 레즈비언이 얼마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아직은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여성’과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가 겹치면서 이중의 소외를 겪게 되는 것이다. 진보신당 성(性)정치기획단 대표인 최현숙씨는 “여성 노동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면서 “경제적 독립이 어렵다는 점이 레즈비언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설명한다. 같은 동성애자라고 해도 레즈비언이 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지적이다.

부정적 인식 키우는 미디어
동성애자 문제도 남성 중심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 대표 한채윤(37)씨는 “게이의 문제는 군형법의 동성애자 처벌이나 에이즈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크게 부각되는 반면 레즈비언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고 지적한다.

“레즈비언은 권리는 고사하고 존재조차 인식되기 힘든 형편이지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여성과 동성애자의 문제를 동시에 지고 가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닙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인권정책팀의 보도 모니터링에 의하면 2006년 한 해 동안 종합일간지에 보도된 동성애 관련 기사 중에서 레즈비언 보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6.1%에 불과했다. 영화나 뮤지컬에서도 게이를 즐겨 다루지만 레즈비언은 잘 등장시키지 않는다.

미디어의 편향된 시각 역시 일반인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여성영상집단 ‘움’의 이영 감독은 “2005년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서 10대 여자 이반(동성애자를 일컫는 말) 문제를 보도한 적이 있다”면서 “보도 이후 서울·인천·수원·진주·대구·울산 등의 많은 중·고교에서 프로그램에서 제시한 외모 기준을 잣대 삼아 ‘이반검열’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이반검열’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는 “다큐를 찍으면서 잘못된 보도로 10대 레즈비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레즈비언 바(bar) 등 여성 동성애 관련 보도는 레즈비언을 퇴폐적이고 변태적인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조장하곤 한다. 한국성적소수자연합의 미디어감시단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레즈비언은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에 갇히는 것이 대부분으로 일반인의 오해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상이몽
게이 중에서는 레즈비언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이도 있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레즈비언 희선(가명·29)씨는 “게이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같은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없지 않다”고 했다. 희선씨는 게이 선배에게서 “가족의 결혼 성화에 못 살겠다. 계약 결혼을 해서 아이 하나만 낳아 달라”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게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차별이 레즈비언보다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인 게이 명석(가명·23)씨는 “상대적으로 사회 활동이 많은 게이가 가부장적·이성애중심적인 사회 관념에 더 많은 피해에 노출된다”고 했다. 직장인 명현(가명·28)씨는 “한국에서는 여성이 동성 친구와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면서 “레즈비언 커플이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레즈비언 경미(가명·31)씨는 “더 가시적으로 드러나 사회적 차별을 당한다는 게이들의 말이 맞는 면도 있지만,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레즈비언의 가야 할 길이 멀게 느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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