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잊지못할 한해>출판기획·저술가 박영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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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출판기획자이자 저술가인 박영규(32)씨. 그의 수염은 ‘자유인’의 상징이다. 올해 들어서야 맘놓고 기를 수 있었다.

해동불교신문사 편집부장을 지내던 그가 오로지 글만 쓰겠다는 꿈으로 서운관출판사 편집장이던 부인과 지난해 6월 같은 날 직장에 사표를 던질 때만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올 3월 발표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 刊)은 그런 불안을 말끔히 씻어줬다. 지금까지 무려 35만부나 팔렸으며 아직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유인’ 변신후 두번째 저술인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은 그 인기가 더욱 높아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부나 팔렸다. 가위 폭발적이다. “우리 독자들이 역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때라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처럼 우리가 지나치게 서구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반성한 것이 아닐까요. 역사를 인물중심으로 접근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먹혔던 것같아요.” 외국어대 독어과 출신에 무슨 역사서냐 싶지만 그와 잠깐이라도 대화해 보면 금방 의문이 풀린다. 역사·철학·문화·과학·우주등의 분야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역사분야의 지식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몽골까지 폭이 아주 넓다. 취미가 백과사전 뒤지기다. 그러다가 한가지 재미있는 아이템이 잡히면 그것을 줄기차게 파고들어간다.

박씨가 우리 독서문화에 기여한 공로는 참으로 크다. 먼저 우리 역사서 붐을 일으켰다. 현재 그의 책은 사학전공 대학생 사이에 필독서로 통한다. 대형서점 인문분야 베스트셀러 1,2위에 두권이 나란히 올라 있다. 우리 출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독서 연령층을 크게 높였다는 점도 꼽힌다. 40대에서 70대까지의 독자를 많이 끌어들였다.

“처음에 우리나라 주독자층인 20대가 아닌 40대 이상 독자들이 반응을 보여 어리둥절하더군요. 문중의 뿌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면서 도움을 청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40대 이상 연령층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출판계가 읽을만한 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박씨가 우리 역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89년 대학졸업후부터였다. 괴테·헤세에 대한 논문을 쓴 자신이 정작 ‘우리 선인인 박지원(朴趾源)과 허균(許筠)에 대해 아는 것이 뭐냐’는 반성에서였다. 그래서 이황(李滉)·이이(李珥)등 우리 사상가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선에서 끝나지 않고 고려에 이어 현재 삼국시대 역사로까지 올라가고 있는데는 올해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시오노 나나미도 자극이 됐다.

그의 역사관은 확고하다. “현재의 한반도를 기준으로 역사를 풀어나가려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옛 부여와 우리 민족을 연결시키려는 작업이 없는 것도 그런 예지요. 가급적 역사는 확대 해석해야 합니다.” 이 책의 감수를 받으려고 어느 사학자를 찾았다가 “수많은 작가들이 상상력을 얻는 ‘보물’인 조선왕조실록을 감히 한권으로 담겠다는 발상을 하다니”라는 호통을 들었다는 에피소드에서는 역사학계의 경직성이 느껴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일본의 신조사(新朝社)와 저작권 계약도 체결했다. 선인세도 8천달러로 꽤 높은 편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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