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칼럼>장밋빛 空約에 우울한 세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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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는 요즘,겸허한 마음으로 찬찬히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다가오는 새해를 알차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와 계획을 세워야 하는 때다.
그러나 노동계 파업과 여야 대립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올 연말 국민들은 우울하다.
자동차공장으로,병원으로,지하철로 확산돼가는 파업으로 겪어야 하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지옥철(地獄鐵)'이란 오명(汚名)이 붙은지 오랜 지하철은 이젠 타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고 병원을 찾아 감기약이라도 한번 타 려면 서너시간은 족히 걸린다.
경제는 또 어떤가.가계에 보태겠다고 푼돈을 모아 시작한 주식투자에 본전도 못 건진 주부들은.재(財)테크'실력을 원망하며 속을 태우고,명예퇴직했다는 이웃들도 늘어만 간다.뿐인가.날로 치솟기만 하는 물가에 장바구니는 더욱 초라해져 가 고 자녀들의과외비 걱정에 한숨은 깊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권은 여전히 몸싸움과날치기,그리고 항의농성이라는 극한 대결과 구태(舊態)를 재연해국민들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수(數)의 논리'를 앞세운 여당은 새벽에 몰래 의사당에 들어가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오만(傲慢)을 범했다.야당은 즉각 항의 농성과 시위로 응수했다.
여당은 웃지 못할 난센스로 국민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이를 저지했어야 할 야당은 다 늦게 장외투쟁을 선포하며 뒷북을 치는 것같아 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 난국에서 두 쪽 모두 당면한 경제난과 사회 혼란에 대한 처방을 내놓기보다 자신의 몫만 챙기려는 태도가 역력하다는 것이다.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노조 파업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상처 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야 할 정치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불과 몇달 전만해도 민생정치.생활정치를 주창하면서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다녔던 국회의원들은이제 그 많던 문제들을 다 접어두고 고개숙인채 침묵하고 있다.
4.11총선을 앞둔 지난 연초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장밋빛 구호와 공약을 내보이며 새 정치를 다짐했었다.낡은 정치를 몰아내고 새로운 선진정치를 해보겠다며 앞다퉈 지지를 호소했었다.
하지만 이 해를 넘기기도 전에 철석같았던 선량들의 약속들이 헛구호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언제까지 민생.생활정치는 한낱 선거용 구호에 그쳐야 하는 것일까.고장난 레코드판을 내려놓을 용기있는 자는 정녕 없는 것인가.
이정민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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