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스타일리스트>20대 여성 행위예술가 이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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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미소를 지녔든,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 얼마나 균형잡힌 근육질 체격을 지녔든 이네들이 우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온다고 치자. 그림틀을 부수고,조각 받침대를 박차고,‘있어야 할’자리에서 벗어나 미술관 밖으로,세상속으로 나서는 예술과 마주치는 경험은 낯설고 당혹스럽기 짝이 없을게 뻔하다.

지난주 토요일 대학로와 지하철 혜화역을 지나던 사람들은 현대미술만이 선물할 수 있는 이 당혹함과 맞부닥치는 행운을 누렸다.문예회관 대극장 앞.마치 운반중 잠시 내려놓은 것처럼 포장용 비닐에 싸인 사람 형태의 작품 네 점이 나란히 서있다(아래 사진).처음 호기심을 드러낸 것은 역시 중학생들.“야,눈이 깜박거린다.” “사람인가봐.” 구경꾼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하고 이 작품들은 다소 로봇같은 몸동작으로 비닐포장을 스스로 뜯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색 찬란한 아크릴판을 볼트와 너트로 조여 만든,코르셋 비슷한 의상에 다소 그로테스크한 분장과 가발.무채색의 겨울옷차림 일색인 현실의 사람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네들의 퍼포먼스가 수많은 행인의 시선과 발길을 붙드는 사이 방송용 카메라와 촬영 스태프도 쉼없이 제 할일을 한다.

촬영중인 것은 문화예술 전문 케이블 채널‘A&C코오롱’의 문화체험 프로그램인 ‘아무개씨의 문화발견’. 네 점의 작품은 젊은 미술가 이윰의 ‘살아있는 조각’이다. 살아있는 조각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작품인 아크릴판 의상을 입은채 또다른 작품으로 변신해 풍선 부는 기계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이윰.작품이기도 하고 본인이기도 한 묘한 상황,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라이브 콘서트에서 음악을 즐기는 것처럼 라이브한 미술을 즐기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이 미술가는 71년생.라이브(live)하고 쿨(cool)한 것에 목마른 세대,기성세대들이 불가해(不可解)하면서도 겉모습만으로 재단하기 좋아하는 소위 X세대의 첫머리인 셈이다.무작정 길거리로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난해 열린 첫 개인전 ‘빨간블라우스’, 지난 7월 약 50명이 함께 참여한 ‘TV전’등 그가 참여하는 전시마다 퍼포먼스는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퍼포먼스뿐만이 아니다.OHP영상,작업내용을 상징하는 짧은 소설,이런 모든 장치가 전시물과 함께 관객을 만난다.미술관에 얌전히 놓이는 대신 펄펄 뛰고 살아 숨쉬는 작품을 만들고픈 욕망이 가득한 것이다.그래서 동판과 철판을 용접해 만든,도저히 입을성 싶지 않은 옷도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변신시키곤 한다. 97년2월‘미지예’무용단과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미술관 아닌 무대 위의 미술을 선보이는 것을 포함,그의 구상과 작업에는 거침이 없다.

아직 홍대 조소과 대학원에 재학중이지만 지난 2년동안 그가 참여한 크고작은 전시회는 모두 일곱차례. 가장 최근인 지난 11월, 서울창담동 '갤러리시우터'선정 96신진작가로 갖게된 두번째 개인전에선 대형 사진패널이 퍼포먼스의 몫을 대신했다.

만화영화의 여자로봇처럼 원뿔 가슴을 단 빨간 아크릴 원피스와 그걸 입은 치렁한 은발머리의 게이사진. 억압된 성(性),억압적인 정치상황,억업당하는 여성. 이런 옛날 화두를 갖고 이윰의 작품에 접근한다면 실수가 분명하다.

의상의 가슴부위가 툭 튀어나왔다고 해도 에로틱한 여성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으며 게이모델이 출연했다고 해 감춰진 욕망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꿈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실현시키는 것" 이라고 당찬 추진력을 보이는 이 작가의 세대는 인간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대표시키는 양극단의 강박관념대신 남성.여성.게이.레스비언 같은 다원의성 (性),다원적 가능성에서 자신들의 창작조건을 찾기 때문이다. 작가자신은 "내가 가진 것은 성에대한 관심이 아니라 중성(中性)성에 대한 관심"이라고 오해를 미리 막는다.

이 작가가 속해 있는 세대의 정체는 그가 작가이자 공동기획자로 참여했던 'TV전'에서 한결 두드러진다. 다들 이제는 신선할 것 하나 없는 매체라고 생각하는 텔레비젼만이 이 전시회에 모여든 20-30대 젊은 작가들에겐 어린시절 영상적 감수성을 지배했던 공통분모이자 온갖 뉴미디어의 가능성이 출발한 단초로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화두였던 것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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