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세기말의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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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말에 색깔이 있다면 세기말은 회색일 것같다.시대구분과 캘린더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는 해도 1백년단위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세기말이라는 표현에는 우울(憂鬱)과 데카당이 묻어나는 것같다.서양과 일본이 악귀처럼 달려들던 한세기전 1 890년대의조선사람들에게 세기말은 회색이 아니라 절망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20세기말에는 특히 깊은 감회를 느낀다.2년후면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뿐 아니라 새로운 천년(Millennium)이 열린다. 프랑스의 국제문제전문가 장 마리 게노교수는 20세기말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1989년에 종말을 고한 것은 1945년에 시작된 냉전시대도 아니고,1917년에 시작된 사회주의의 흥망의 시대도 아니다.1989년은,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된.국가의 시대'에종지부를 찍은 것이다.프랑스혁명에 의해 평민이 국 가의 주권자가 된 것이 근대적 정치체제의 원점이다.우리가 살아 온 근대는국민국가의 시대였다.그리고 지금,그 시대가 끝나려 하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극대립의 견인력이 사라졌다.그래서 거의 모든 나라가 사분오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통신의 혁명과 지역블록화를 통해 국경없는 세계에 편입돼 국가단위의 주권의식은 퇴색된다는게 게노교수가 강조하려는 요 지인 것같다. 2년전 영국 BBC의 세기말 특집에 참가한 역사학자 애사 브릭스에 의하면 서양에서는 중세까지도 세기라는 개념이 통용되지 않았다.특정한 사건의 기록에는 당시 재임중인 국왕의 연호가 사용됐다.
서양의 세기말을 보면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항로 발견과 1299년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발간,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으로 서양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이 혁명적으로 확대돼 20세기의 중반까지 계속되는 세계제패 (制覇)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서양의 세기말에서 가장 큰 사건은 프랑스혁명이다.절대왕조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나폴레옹전쟁을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와 평등이념을 대륙에 전파한 프랑스혁명의 인류사적 공헌은 절대적이다.
기원후 스무번째의 세기가 막을 내리려 한다.냉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다.그런데도 한국은 전세기(前世紀)일본의 한국침략의 유산으로 비롯된 분단의 짐을 지고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맞아야 하는 힘겨운 처지에 있다.
한국의 세기말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참담한 사건은 1894년의동학란에서 발단된 청일전쟁,1904년의 러.일전쟁을 거쳐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일이다.1392년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그리고 1592년의 임진왜란 또한 세기말의 불확실성과 집단적인 핍박을 가져온 사건이기는 해도 20세기말로부터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사건이다.
세기말과 천년단위를 말하는 것은 생각의 지평을 넓고 크게 하자는 것이다.그리고 지나간 세기를 회고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만큼의 교훈을 배웠는가를 반성하기 위함이다.그런 반성위에서 우리는 21세기의 도전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를 자문(自問)할 때다.
불안한 안보.무역분쟁.인구폭발.환경문제 등 다음 세기에 우리가 당면할 도전은 다양하고 심각하다.중국 농촌노동력 4억의 절반이 하루 3달러의 임금으로 도시지역 제조업에 투입되고,중국의공업화로 인한 대기오염으로 한국의 오존층은 파괴 될 위험에 처한다.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반도에서 주변4강의 이해가 충돌한다.중국과 일본이 패자(覇者)자리를 노리지도 않고 군비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미국의아시아전략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미국의 안보우산도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지금 한국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허무 주의와 냉소주의를 보면 세기말의 대표적인 증상만 나타나고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대한 처방은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국제문제대기자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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