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최대한 정중히 인수팀 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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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1년 1월 취임식을 마치고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다소 기분이 상했다. 비서실 몇 곳의 컴퓨터 키보드에 ‘W’ 단추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였다. ‘W’는 부시의 가운데 이름 ‘워커(Walker)’의 머리글자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을 뜻하는 알파벳으로 종종 사용된다. 그런 글자가 몇몇 컴퓨터 키보드에서 없어졌다는 걸 확인한 부시의 백악관은 정권을 넘겨주고 나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비서진을 의심했다. 언론도 “클린턴 비서진 일부가 짓궂은 장난을 한 것”이라며 “예의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런 기억이 떠올랐을까. 부시 대통령은 6일 연방정부 고위 공무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정권 인계 작업의 예의범절을 강조했다. 그는 “정권 이양을 최대한 원활하게 하는 게 남은 임기 중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라며 “여러분이 지금까지 보여 준 것처럼 정중하게 행동하고 프로정신을 견지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또 “평화적 정권 교체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라며 “앞으로 몇 주 동안 여러분이 버락 오바마 당선인의 정권인수팀에 주요 정책 현안을 잘 브리핑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그런 그에 대해 오바마는 사의를 표명했다. 이날 성명 발표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한 초당적인 정신을 부시 대통령이 발휘해 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다”고 했다.

정권 이양기에 들어선 미국의 신구 권력은 이처럼 협력과 존중의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정권 인계 작업을 제대로 하라는 지시를 백악관과 행정부에 여러 차례 내렸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대선 전부터 “인계를 잘하자”고 직원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고, 마이클 헤이든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요원들에게 ‘두 고객(부시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인)을 잘 모시자’는 편지를 보낸 건 부시가 깔끔한 정권 인계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백악관 소식통은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국방부는 오바마의 인수팀을 위해 사무실을 마련했다. 국방 분야를 담당할 오바마의 인수팀 관계자가 50명가량 올 것으로 보고 충분한 공간을 확보했으며, 컴퓨터와 전화·책상 등 각종 집기를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연방수사국(FBI)은 ‘오바마 행정부’의 산뜻한 출발을 돕기 위해 차기 행정부에 들어갈 고위직 후보의 명단을 선거 전부터 건네받아 신원 조회를 하고 있다. FBI는 명단이 오는 대로 신속하게 처리한다는 입장이다. 오바마는 6일 시카고의 FBI 사무실을 방문해 업무 브리핑을 받았다. 또 마이클 매코널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보고도 받았다. 16개 정보기관을 관장하는 DNI는 앞으로 오바마에게 일일 보고를 할 예정이다. DNI의 브리핑 내용은 부시 대통령이 받아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의 최고급 정보라고 한다.

‘나가는 권력’의 대접이 극진하자 ‘들어오는 권력’도 몸을 낮췄다. 오바마는 15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G20(선진 7개국+한국 등 13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손님을 맞는 부시의 입장을 배려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뉴욕 타임스 등이 보도했다. CNN방송은 “오바마는 G20 회의가 열리는 동안엔 자신의 경제팀 인선 결과도 발표하지 않을 것”이라며 “회의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게 오바마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오바마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부시를 ‘경제를 망친 주범’으로 몰았다. 그런 오바마에 대해 백악관은 불쾌감을 나타낸 적도 있다. 부시 부부는 10일 오바마 부부를 백악관으로 초대한다. 선거 후 처음 대면하는 두 권력자가 이번엔 어떤 처신을 할지 미국과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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