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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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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최근 미국의 한 정치유머 사이트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로마시대의 검투사 옷을 입혀놓고 ‘글래디에이터’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사진이 올랐다. 어쩌면 거기엔 ‘미국=로마’ ‘조지 W 부시=검투사 콤모두스 황제’라는 등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콤모두스 사후에 로마 내부의 난타전을 거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된 것처럼 아프리카 케냐 출신의 아버지를 둔 버락 오바마가 예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본선에서 존 매케인을 차례로 제치며 미국 대통령이 됐다.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 것일까?

#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가리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친위대를 해체했다가 다시 그 정치적 유용성을 깨닫고 종전의 네 배 규모로 키워버려 결국엔 반세기 동안 무려 23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 황제시대를 열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란 거창한 꼬리표를 거침없이 달 수 있을까? 어쩌면 기번마저 어쩔 수 없는 편견 속에서 그가 흑인 출신의 로마황제였다는 사실을 알고 더 폄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 중국계 미국인으로 『제국의 미래』를 쓴 예일대의 에이미 추아 교수는 제국의 존립 및 지속 조건으로 ‘관용’을 말했다. 미국은 현대의 제국이다. 그것이 지속되려면 ‘관용’이 필수다. 하지만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다고 당장에 미국이 관용의 나라가 되리라고 보는 것은 다소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혼란의 서곡일지도 모른다. 마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친위대를 해체했다가 그 유용함의 맛을 뒤늦게 알고 네 배로 키워내 결국은 엎치락뒤치락하는 군인 황제시대의 혼란을 초래한 것처럼 말이다.

# 지금 우리는 분명히 역사의 큰 물결을 타고 있다. 현대의 제국인 미국이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역사적 함의는 크고 깊다. 하지만 이것은 변화의 서곡에 불과하다. 더 큰 역사적 변동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역사적 변동의 거대한 진폭을 가늠하려면 지금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흑인 출신의 로마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초반에 등장한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것이 476년이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지속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물론 역사가 단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사가 미래를 가늠하는 데 없어선 안 될 기준임은 틀림없다.

 #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로마의 쇠퇴기부터 쓰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부터 썼다. 특히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룬 티투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로부터 시작했다. 흥륭(興隆)의 자만은 언제나 쇠망의 기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