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家 여성들도 개척자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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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우드 4세 원한광 박사

한국 사람들은 언더우드가(家)를 생각할 때 새문안교회와 연세대를 세운 선교사들을 떠올린다.

우리 가문이 한국에서 종교와 교육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언더우드가 여성들의 119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4대에 걸쳐 자신들의 일생을 한국에 헌신한 언더우드가 여성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1885년 원두우 목사가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이후 3년 뒤 릴리아스 호튼 박사는 서양 여성의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 시카고를 떠나 멀고 위험한 한국을 찾아 1921년 숨질 때까지 의료활동을 했다.

릴리아스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왕족과 양반계급 여성들을 전담했다. 당시 미국에도 여의사가 적었으니 그가 한국의 많은 여성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릴리아스는 서양의학을 한국에 소개했으며 여성도 남성처럼 똑똑하고 결단력 있고 교육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 사회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여성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할머니 에델 반 와그너는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4세 때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을 떠나 1만2000㎞나 떨어진 한국으로 올 정도로 용감했다.

할머니는 4년 동안 한 교실에서 학년이 모두 다른 30명의 학생을 가르친 서울외국인학교의 유일한 교사였다. 그의 수업은 서울외국인학교의 시작이었고 이 학교는 지금도 1200명의 외국인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31년 백두산 정상에 오르기도 했던 할머니 에델은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했고 이 고아원은 에델 언더우드 소녀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60년 동안 지속됐다. 공산당 활동이 극에 달했던 49년 4월 에델은 집에 침입한 4명의 청년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살해됐다.

나의 어머니 조운 데이비슨은 한국에서 영국 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15세 때 영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영국에서 조운은 엄청난 어려움과 문화적 충격에 휩싸였다. 11년간의 영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온 조운은 나의 아버지 원일한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조운은 일생을 서울외국인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냈다. 그는 매우 엄한 선생님이었다. 나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다른 수업에서는 모두 A를 맞았지만 어머니의 수업에서만 B학점을 받았다.

55년부터 76년까지 그는 연세대 영문과에서도 영어 회화와 글쓰기를 가르쳤다. 53년 나의 어머니는 포켓 사전을 만들어 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전은 계속 출판되고 있다.

나의 아내 낸시는 이번 여름 18년에 걸친 연세대 영문과 교수직에서 물러난다. 낸시는 영문과에서 훨씬 더 활동적이었다. 낸시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추천서를 쓰고 한국 학자들을 위해 영문으로 된 책들을 편집하고 수정했다.

정리=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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