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신은경'에서 '허재'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탤런트 신은경(申恩慶)이 풀려나는 걸 보고 분개했던 시민들은그러면 농구선수 허재(許載)도 풀어줄 것인지 어디 두고 보자며단단히 벼르고 있다.미운 짓은 저질렀지만 신은경과 허재는 사법부의 구속관행과 우리의 법감정에 대한 시시비비 를 가려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허재도 신은경처럼 구속적부심을 신청하면 법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허재의 경우가 신은경의 경우보다 혐의가 무겁고 죄질도더 나쁜 것은 분명하다.혐의의 경중이나 죄질을 구속의 한 가지기준으로 삼아온 이제까지의 사법관행으로 보면 풀려나기는 어려울것이다.더구나 신은경사건으로 국민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터라 또다시 법원이 허재에 대해 석방결정을 내리기가 적이 주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사소송법은 신체의 자유와 무죄추정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한 헌법정신에 따라 구속할 수 있는 사유를 ①일정한 주거가 없을 때 ②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을 때 ③도주할염려가 있을 때의 단 세 가지로 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허재의 경우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주거는 일정하다.혐의 사실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있고 본인도 자백.인정했으니 증거인멸의 염려도 없다..도망의 염려'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1백%의 보장은 할 수 없겠으나 그 정도의 범죄로 도망쳐 이근안처럼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꽁꽁 숨으리라고상상하기는 어렵다.그렇다면 적어도 법적으로는 허재 역시도 구속해야 할 사유가 없는 것이다.
신은경이 풀려난뒤 신문사에 걸려온 항의 전화의 주된 내용은 무면허에 음주운전에,비록 50지만 뺑소니까지 겹쳤는데 어떻게 석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불구속보다 구속을 원칙으로 하고 구속을 형벌시 해온 이제까지의 사법처리 관행에 비추어 당연한 항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잘못된 것은 이번 적부심의 결정이 아니라이제까지의 그런 관행이다.검.경은 물론 사법부까지도 헌법정신과형사소송법이 명시하고 있는 불구속 원칙을 무시한채 마치 구속이원칙인 양 법을 운용하며 불구속을 사실상 특 혜의 수단으로 활용해온데 잘못이 있다.그것이 바로 유명인의 불구속에 대해 국민들이 저항감을 갖게 된 주요인일 것이다.
정의의 핵심은 형평이다.그런 점에서 이제까지의 관행에 비추어형평에 어긋난 것이 분명한 이번 적부심에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이해할만하다.그러나 신체의 자유와 무죄추정권이 우리의 기본권이고 그래서 피의자에 대해서는 구속 이 아닌 불구속원칙이 옳다면 이번 적부심의 결정을 불구속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와 전환점으로 승화시키는 슬기가 필요하다.
죄질이 나쁜 범법자의 인권을 보장해주는건 감정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힘든 일이다.그러나 정의와 인권은.가장 나쁜 시민에게도가장 선량한 사람과 동등하게 법적 보호를 해줄 때'보장되는 것이다.한 사회의.법적 도덕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그 사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범법자의 권리를 어떻게 확보해주느냐 하는 데 있다'는 말도 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로 시작되는 이른바 미란다장전(章典)은 우리 경찰도 채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의자 인권보호 지침이다.이 미란다장전을 탄생케 한 사건의 주인공인 에르네스토 미란다 는 18세소녀를 사막으로 납치해 강간한 흉악범이었다.그러나 미연방 대법원은 이 흉악범이 수사단계에서 묵비권을 고지받지 못했고 변호사의 조력을 못 얻었다 해서 유죄의 원심을 파기했던 것이다.
흉악범에게까지 철저히 인권과 법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회가 된다면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인권과 법적권리가 확고부동하게보장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비록 허재가 신은경보다 죄질이 더 나쁘고 혐의도 더 무겁지만 구속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풀어주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옳다.
비록 허재는 반성의 의미에서 적부심신청은 않기로 했다지만 허재까지 풀어준 다면 불구속 원칙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오히려 허재도 풀어주라고 전화를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우리들이 진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은 허재에 대한 처리가 아니라 허재 다음에 우리의 평범한 이웃에 대한 처리에서도 법원이 불구속 원칙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