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감 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자-不實번역 풍토에 自省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심한 표현 같지만.자기 눈의 들보'도.남의 눈의 티'도 못본척 하는 세계가 있었다.우리 번역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긁어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 서로의 잘못에 관대한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부실한 번역풍토에 자성을 촉구하는 반가운 현상이 일고 있다.때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올바른 번역,정확한 번역을 시작하자고 주문한다..출판의 성수대교'.번역의 삼풍백화점'을 더이상 짓지 말자는 각오들이다.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강조한 에드워드 사이드의.권력과 지성인'(창刊)을 싸고 최근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오역논쟁은 그 단적인예다.단어.문장.고유명사등의 오역을 꼬집으며“완전히 재번역돼야한다”고 주장한 영남대 박홍규교수에 맞서 번역자 전신욱.서봉섭씨는“용어해석에는 학계에도 이견이 있다”고 반박하면서“인명표기의 오류는 인정,충실한 번역판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번역문제를 파고든 단행본도 속속 나오고 있다.번역이 학문의 한분야로 자리잡은 외국과 달리 국내번역관련 출판은 황무지와 다름없었다.불을 댕긴 작품은 소설가 안정효씨의.번역의 테크닉'(현암사刊).20여년의 산경험을 살려 대리.날치기번 역등 무성의한 태도를 고발하고 번역의 여러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발간 석달만에 3만부가 나가 저자조차“독자들이 책을 기다린 것같다”고 놀라워한다.
영자신문 교정기자 출신 박정국씨의.오역천하'(어울림刊)도 저명출판사들의 베스트셀러에 나타난 오역을 조목조목 따진다.인용된사례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박씨는“사회윤리를 따지는데핏대를 올리는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부실공사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며“오역투성이를 버젓이 내는 출판사의 실종된 서비스정신”을 개탄한다.경남대 국문과 김정우교수는.영어를 우리말처럼 우리말을 영어처럼'(창문사刊)에서 다양한 실례를 들며 우리말의 올바른 구사를 역설한다.
전문잡지 창간도 눈에 띈다.창간 한돌을 맞은.번역의 세계'에이어.번역나라'.번역가'가 선보였으며 우리 문학을 외국에 소개하는.문학과 번역'도 나왔다.
한국문학의 번역에 초점을 맞춘국제심포지엄도 최근 2건이나 열렸다.하이텔.유니텔등 국내 PC통신망에도 번역코너(ID TRANSL)가 이달말 개설된다.비디오.케이블TV등 확대된 번역시장과 고학력 주부.실업자의 증가가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흔히 번역은.반역'.제2의 창작'에 비유된다.언어는 물론 감정.사고.관습등 이질적인 문화속에 생산된 저작을 1백% 동일한의미로 옮기기가 지난하기 때문이다.
전문번역가 유혜자씨가“완역까지 적어도 7번 통독한다”고 실토하고 움베르트 에코의.푸코의 진자'를 고쳐낸 이윤기씨는“뉘앙스(말결)와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고백하며 안정효씨가“단어.쉼표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할 만큼 번역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번역은 사실.반역'보다.배신'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번역이 연구성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계 풍도가 사태를 악화시켰다.지금껏 번역은.죽은 노동'으로 평가절하됐다.
정확한 번역은 오늘날 문화의 기초다.우리처럼 외국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독자들도 지금까지의 심드렁한 자세에서벗어나 중대한 오역을 발견하는 즉시 출판사에 시정을 요구하는 적극성을 보일 때 번역문화환경도 달라질것이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