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21.비자금 필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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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의 가정에는 비상자금(Emergency Money)이란 것이 있다.이것은 저축률이 낮고 신용할부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모아두는 현금을 말한다.
물론 비상자금의 유무에 대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 로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가정에는 비상자금과 비슷한 개념으로.비자금'이라는 것이 있다.하지만 미국의 비상자금과는 달리 우리의 비자금은 부부간이라도 그 존재여부를 전혀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제일제당이 전국의 주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따르면 62%(6백15명)의 주부가 비자금을 갖고 있다고 답했으며 액수는 평균 3백만원대인 것으로 조사됐다.그리고 한 방송사 프로그램이 조사한 비자금 유무에 대한 직장인 남녀대상조사에서도 남자 45%,여자 53%가 비자금을 갖고 있으며 액수도 각각 6백만원과 9백만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처럼 비자금은 우리사회 어느 곳에나 만연돼 있다.심지어 .배우자가 모르는 자기돈'이 없으면 친구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주부 박모(46.서울서초구반포동)씨는 4년전부터 남편몰래 계를 들어 비자금 1천만원을 모았다.돈을 모으는 동안 생활비 외에 친정을 돕는다거나 자신의 옷을 사입으면서 3백만원 정도를 사용하기도 했다.올초에는 남편 사업이 어렵다며 돈을 구해달라기에 그중 5백만원을“친구에게 빌렸다”며 남편에게 준 적도 있다.물론 남편으로부터 이자까지 받았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몹시 화를 낼 것같아 불안하기도 하죠.그러나 어떡해요.점차 써야할 곳은 늘기만 하는데요”라는게 박씨의 변(辯).
경기도분당에 사는 주부 차모(37)씨는 지난달 남편과 이혼을고려할 정도로 심하게 다퉜다.싸움의 계기는 남편의 비자금.시누이 결혼식에 남편이 차씨 몰래 1백만원을 더 부조한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었다.차씨는“전체 비자금 액수와 어 떻게 모았는지에 대해 끝내 입을 다무는 남편을 보며 신뢰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면서 “.남편은 남'이란 생각이 들어 시댁과의 관계도 더 어려워질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일일이 쓸데를 말하고 돈을 타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고 때론자존심도 상한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딴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이동원(李東瑗.사회학과)교수는 “부부가 서로 모르게딴 주머니를 차게 될 경우 상호신뢰성이 무너질 수 있는 계기가될 수 있다”며 “부부관계는 비자금을 만들어 사용하는 편리함보다 신뢰성이 중요시되는 관계이므로 불편하더라도 대화와 타협으로금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옳다”고 말한다.
결혼생활 4년째인 정미진(鄭美眞.32.경기도의정부시)주부는 시집올때 친정아버지가 준 2백만원을 비자금으로 사용해 왔다.정씨는 그 돈으로 친구도 만나고 옷도 사입곤 했다.평소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인 정씨는 최근 돈 씀씀이에 대해 얘기하다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자신도 그렇지만 남편에게서도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그래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자신의 비자금을 공개했다.그랬더니 남편도 용서(?)를 빌며 자신의 비자금 4백만원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정 씨와 남편은 이후 둘의 비자금을 합쳐 똑같이 나눠 갖고 있다.비자금이 있는 것은 서로알지만 사소한 용처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전 비자금보다 둘이 알고 있는 비자금도 괜찮은 것같아요.
약간의 재량권도 있으면서 떳떳하기도 하고요”라고 정씨는 말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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