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20.집안일 주부 전유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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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파출부.보모.유아교육학자.재테크전문가.경조사관리자….
한국 가정에서 주부들은 하나같이 문자 그대로 「1인 10역」은 거뜬히 해내는 슈퍼우먼들이다.
이처럼 집안의 무게중심이 주부에게만 과중하게 쏠린 현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깥세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해질수록 가정을 꾸려가는 일은 오로지 주부만의 책임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식구들은 그저 「손님」처럼 머무르고 있는 한국 가정의 기형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체감온도가 더욱 낮은 요즘같은 입시철이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광경 하나.
아들의 수능시험 예상성적을 뽑아본뒤 『당신은 집에서 도대체 뭐했어?』라는 남편의 고함에 유옥숙(40.서울송파구문정동)씨는『그러는 당신은요?』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기대만 태산같을뿐 자녀문제에 대해 관심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원망이 한순간 치솟았다.
직장일이 바빠 그러려니 이해해 왔었지만 아들 성적까지 아내에게 「무한책임주의」를 강요하는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자녀교육은 부부가 함께 떠맡아야할 수많은 가정사중 일부에 불과할 뿐인지 모른다.
각각의 구성원들이 제 몫을 다할때 한 사회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가정 역시 가족 모두가 가정내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신혼초기를 유학생 부부 신분으로 스페인에서 보낸 박숙희(33.서울노원구월계3동)씨는 자신이 「운이 퍽 좋았다」고 생각한다. 함께 공부하는 처지라 누가 누구에게 미룰 것도 없이 집안의대소사를 아내와 남편이 나눠 처리하는 일이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엔 직장을 가진 남편이 아무래도 전처럼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지만 딸아이 목욕시키기며 피아노 숙제 검사는 확실한 자기 몫의 일로 해내고 있다고 한다.
딸과의 정서적 유대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낼 수밖에 없다는게 박씨 남편의 말.
경기도 분당에 사는 최우섭(38)씨 부부는 결혼초부터 각자 상대방의 부모께 드리는 문안전화와 경조사 챙기기를 엇갈려 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네 부모,내 부모가 아닌 우리 부모인 만큼 누가 챙기면 어떠랴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서로가 경쟁적으로 며느리 노릇,사위 노릇에 충실하다 보니 가정내 분위기가 더욱 화기롭게 살아날 수 있었다.
원만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건 물론부부뿐이 아니다.
결혼후 분가가 보편화되며 점점 더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는 부모세대와의 관계 역시 집안어른으로서 기여할 몫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히 추스를 수 있다.
주부 박종희(37.경기도군포시)씨는 아이들 학교숙제중 가족관계나 존칭,역사와 관련된 것이 있을 땐 꼭 시아버님께 전화를 드려 여쭤보도록 한다.
『물론 제가 가르쳐줄 수도 있지요.하지만 손자.손녀의 숙제를도와준다는 사실에 아버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요.아이들도 어려워하던 할아버지를 훨씬 가깝게 느끼게 됐고요.』 시시때때로 안부전화를 드리는 셈이 되니 1석2조의 일이라 고 박씨는말한다. 백준기(70.서울마포구망원동)씨는 손자.손녀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역할을 자임한 경우.
손자.손녀중 초등학교 1학년생이 나올 때마다 1주일에 한번이고 두번이고 찾아가서 하루에 5자씩 가르쳐 천자문을 다 떼준다고 한다.
대개의 초등학교에서 자습시간을 통해 한자를 가르치게 되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천자문을 먼저 배운 손자.손녀가 『우리 할아버지 최고』라고 으쓱해 하는걸 보는게 백씨의 더없는 즐거움이란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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