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백조’ 출현에 너무 놀라지 말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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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26면

지난 금요일 오전 11시. 코스피 1000 선이 깨진 시각. 기자는 현장의 소리가 궁금했다. 여의도와 명동·강남을 돌면서 증권사·은행 창구 10여 곳을 훑어봤다. 의외로 조용했다. 직원들은 “항의나 하소연 전화마저 뚝 끊겼다”고 했다.

그러나 한풀 벗겨 보니 ‘태풍 전야의 고요함’이라는 냄새가 났다. 친한 증권사 영업맨들이 털어놓은 속내에서 그런 기운이 감지됐다. A증권사 용산지점의 한 차장은 “그동안 요지부동이던 고객들이 오늘은 ‘못 참겠다’며 묻지마 환매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신도시의 B증권사 지점장도 “지난번 빠지기 시작할 때 왜 환매를 말렸느냐. 이제 나 어떡해…” 하며 동요하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토로했다. 강남의 한 증권사 창구에선 “이젠 주가 500도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체념의 소리도 들렸다.

‘항복’ 쪽으로의 방향 선회는 금요일 장에 그대로 투영됐다. 순매수를 하던 개인이 막판에 ‘투매’로 돌변했다. 폭락장 속에서 저가 매수를 지속하던 그동안의 흐름과는 딴판이었다. 외국인 이탈이 멈추지 않는 상태에서 개인까지 동참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진앙지인 뉴욕 증시는 금요일에도 낙하 일로였다. 1000 선 붕괴와 함께 변곡점을 맞은 투자심리가 나쁜 쪽으로 더욱 확산될 월요일 시장이 걱정되는 이유다. 정부는 ‘내놓을 만한 카드는 다 꺼냈다. 뭘 더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할 만큼 속수무책이다.

지금 시장의 패닉을 보면 마치 꿈도 못 꿨던 ‘검은 백조(black swan)’를 만난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검은 백조’는 레바논 출신으로 월가 투자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저서 이름이기도 하다. 서구인이 호주를 발견한 뒤 검은 백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예측 불가능하며 엄청난 충격을 동반하는 사건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지금의 금융위기며 주가 폭락이 꼭 그 꼴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침 토요일 주요 일간지가 그 서평을 일제히 헤드라인 기사로 다룰 만큼 상황은 긴박하다.

그러나 지금은 왜 검은 백조가 나타났는지 따지는 것보다 놀란 가슴부터 달래고 대응책을 찾는 게 우선이다. 중앙SUNDAY는 거품 경고 기사를 쓰면서 일찌감치 탈레브의 또 다른 이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수많은 작은 이익은 이따금 발생하는 커다란 손실과 뒤섞여 있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라는 생각에 큰 손해를 본다”고 했다. 탈레브의 애초 취지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뒤집어 보면 손실 속에서 되레 이익을 바라본다는 역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1000 선이 무너진 뒤 열리는 이번 주 시장은 여러모로 시험대가 될 것이다. 더 많은 투자자가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부화뇌동하지 말고 10년 투자 목표라는 큰 그림에서 마음을 다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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