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도마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씨처럼 자라나고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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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33면

북만주의 흑룡강성은 비옥하다. 흑룡강의 흑룡을 닮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땅이 검다. 북만주 산시(山市)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순국지를 가는 길에 내가 찍은 사진이다. 김을동 의원이 산시에 김좌진 장군의 유적지를 보존해 놓은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한 조선족 여인이 풍요로운 옛 발해 땅에 씨를 뿌리고 있다(2005년 4월 촬영).

제9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2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3 더러는 돌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4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5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78.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우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궁금한 것이 많이 있다. 농부가 어떻게 씨를 뿌리기에 씨가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떨어지고 바위 위에도 떨어지고 가시덤불에도 떨어진단 말인가? 비행기로 씨를 뿌리거나 대형 선풍기로 산 위에서 흩날린다면 모르되, 우리의 농경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귀한 씨를 밭을 갈아엎은 후 이랑을 파서 그곳에 살살 뿌리고 덮을 것이지 왜 그토록 아무데나 막 뿌리는가? 『예수의 비유』라는 희대의 걸작 신학서를 남긴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상세한 답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보고 예수의 비유의 현실성을 확인했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다. 그리고 젊었을 때 목수 생활을 했다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갈릴리는 화산 지역이라서 제주도 같은 현무암 지대이다. 대부분의 땅이 척박한 돌밭이다. 우리나라 황토 흙밭의 농사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감각으로 말하자면 화전민 농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팔레스타인 농사법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식이 아니라 씨를 먼저 대충 뿌리고 난 뒤에 밭을 갈아엎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길과 가시덤불과 돌과 밭이 구분 안 되는 야전에 씨를 뿌리고 쇠스랑으로 대충 덮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비유의 정당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기초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비유로서 매우 중요한 인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만약 요즈음의 우리 농사법과 같이 정밀하게 어떠한 예기되는 목적을 위하여 농부의 관심이 집중되고 행동되고 있다고 한다면 다양한 인간의 상황을 포괄할 수 있는 비유도 생겨나지 않을 뿐 아니라 비교적 가치의 강렬함이 돋보일 수가 없다. 획일적 원인에 대한 획일적 결과만 수반되는 농사는 결코 우리 삶의 과정일 수가 없다.

예수가 돌 항아리 여섯 개의 물을 다 포도주로 만든 혼인잔치의 현장 가나(Cana)의 모습이다. 저 돌밭을 보면 예수의 비유의 리얼리티가 느껴질 것이다(왼쪽 사진).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름진 로마의 빵 바구니 베카밸리. 바알베크 신전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이곳에 떨어진 씨는 120배가 아닌 천 배, 만 배의 수확을 얻을 것이다(오른쪽 사진). 임진권 기자

농부는 무심코 씨를 뿌린다. 길에도, 바위 위에도, 가시덤불 위에도, 좋은 땅에도. 이 네 가지 상황은 모두 인간의 상황이다. 물론 앞의 세 상황은 좌절의 상황이고 마지막 한 번만이 성공의 상황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의 고뇌 없이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좌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공만 보장되는 그러한 인간 상황이 아닌 것이다. 첫 번째 길의 상황에는 새가 쪼아먹는다. 두 번째 돌의 상황에는 뿌리를 못 내린다. 세 번째 가시덤불의 상황에는 성장이 방해되며 벌레가 먹어버린다. 네 번째 좋은 땅의 상황에는 60배, 120배의 풍요로운 결실이 보장된다.

이 언어를 분석하면 1)씨 2)행위자 3)자연적 인과라는 세 요소의 복합적 교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의 상황에는 새라는 행위자, 제2의 상황에는 단순한 자연적 인과, 제3의 상황에는 자연적 인과와 벌레라는 행위자가 복합되어 있다. 그리고 제4의 상황도 완벽한 자연적 인과이다.

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심(平心)하게 분석해 보면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사탄이라든가, 핍박과 환난이라든가, 유혹과 욕망이라는 부정적이고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이 없다. 땅에 떨어진 씨를 새가 쪼아먹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사태이며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새가 악마일 수는 없다. 벌레가 먹든, 뿌리를 못 내리든 모든 것이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행위의 주체자는 역시 씨 뿌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하나의 전일한 목적을 위해서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다른 상황에 씨를 뿌리고, 네 가지의 다른 반응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 반응은 중립적(neutral)이며 자연적 인과에 의한 것이다. 새가 먹는다든가 뿌리를 못 내린다든가 벌레가 먹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든가 사악할 건덕지는 아무것도 없다. 바위에 떨어진 씨가 결실을 못 맺는 것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풍요로운 수백 개의 결실을 맺는 것도 모두 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의 과정이다. 바위에 내린 씨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좌절을 체험함으로써 좋은 땅에서 결실을 얻는 기쁨을 맛보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표현구조는 여지없이 기대의 구조를 뒤엎고 묵시론적 세계를 파기한다. 예수운동의 좌절이나 배척받음의 쓰라린 경험은 사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실패와 좌절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서는 선악의 이원론이나 천당과 지옥의 대결이 없다. 결국 씨 뿌림에는 풍요로운 결실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자연론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삼중의 실패는 삼중의 성공을 보장한다. 예수의 비유는 상상력이 넘치고 기지가 뛰어나며 통찰로 가득하다. 그것은 피안에 있는 초월적 세계의 선포가 아니라 자연의 인과 속에 있는 혁명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나 계시를 통하여 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일상적 체험의 관찰을 통해 획득되는 시적 메타포이다. 신앙이란 피안의 세계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씨 뿌림의 체험을 통하여 성취되어 가는 연속적 과정이며 기다림이다. 모든 씨가 결국 자라나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인내가 우리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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