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울리고 웃기는 ‘작은 녹색 종잇조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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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05면

“저 멀리 시대에 뒤처진 은하계 서쪽 소용돌이의 끝,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변두리 지역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노란색 항성이 하나 있다. 이 항성에서 대략 구천팔백만 마일 떨어진 곳에 시시하기 그지없는 작은 청록색 행성이 공전하고 있는데, 이 행성에 사는 원숭이 후손인 생명체들은 어찌나 원시적인지 아직도 전자시계가 꽤나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돈의 사회심리학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아니, 있었는데-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는데, 이 해결책들은 대부분 주로 작은 녹색 종잇조각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볼 때, 불행한 것은 그 작은 녹색 종잇조각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쾌한 농담과 상상이 가득한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지구와 인간을 묘사한 부분이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가 에둘러 표현한 ‘작은 녹색 종잇조각’이 지폐, 즉 돈을 가리킨다는 것을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다. 우주 밖에서 지구를 봐도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지지고 볶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인간은 왜 돈에 집착하는가
원숭이 후손인 생명체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돈. 달관한 도사마저도 꿈쩍 못하게 하는 돈. 살기 위해 돈이 있는지 돈 때문에 사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엊그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고생의 17.7%가 10억원을 벌 수 있다면 10년 징역은 달게 받겠다고 했단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돈이라면 행복을 줘야 할 텐데 과연 그런지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야기처럼 분명하지 않다.

돈이 생긴 지 제법 되었지만 그 몇 천 년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 비해 아주 짧다. 단세포 생명이 번식과 진화를 시작한 수십억 년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이 지나치다면, 초기 영장류가 모습을 드러냈던 6500만 년, 혹은 더 양보해서 직립보행을 하는 인류의 직접 조상이 출현한 400만 년 정도 하고만 비교해도 아주 짧은 시간이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많은 문명의 산물들이 그렇듯이 인간의 몸에, 심성 구조에 돈을 선호하는 성향이 새겨지기엔 짧은 시간이다. 따라서 병적인 중독증이 아니라면 인간이 열망하는 것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 자체는 아니다.인간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돈이 가진 마법과 같은 기능 때문이다. 자원을 끌어 모아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려는 것은 생명의 본질이다. 돈을 통해 자원을 교환하는 구조에서 인간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자신이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그것을 통해 생식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에 돈이 동원되는 것도 극락조가 아름다운 긴 꼬리를 과시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인간 사회에서는 생존과 관련된 원초적 욕망들이 돈에 대한 욕망들로 치환되어 있다. 그래서 가끔 생존에 대한 열망을 돈에 대한 욕망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돈이 아니라 우울증 탓에 자살
개를 가두어 놓고 전기 충격을 주었을 때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계속 저항을 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개는 포기하고 전기 충격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단계가 오는데, 그것을 우울증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 상태에 이른 동물들의 생리학적 변화를 가지고 우울증을 치료하려 노력하고 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때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에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실제로는 생존과 관련해서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상적인 상황에서 하는 극단적 선택일 뿐.

돈이 교환의 매개로 사용되는 한 인간은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돈을 욕망하는데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목숨을 끊는 것은 모순이다. 목숨을 이어가려는 생명의 본질에 반한다. 작은 녹색 종잇조각이 없다고 기름 떨어진 자동차처럼 멈추어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청록색 행성의 원숭이 후손들이 단세포 생명 시절부터 이어온 생명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놓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많은 경우 자살로 이르는 선택은 인간 뇌 작동의 오류인 우울증에서 출발한다. 그 오류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치료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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