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家 진실을 말하다 - “근혜 언니와 갈라선 18년, 통곡의 ‘짝사랑 세월’ 보냈다 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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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3. 친구처럼 지낸 ‘동생 박지만’
- “지만이 장교일 때 언니가 손수 콩나물국 끓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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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령 씨는 3남매가 함께 살던 성북동 시절을 가장 행복해 했다. 왼쪽부터 박근혜 전 대표, 지만 씨, 근령 씨.
근령 씨가 <월간중앙>과 세 차례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언론에는 동생인 박지만(50) EG 회장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박지만 회장은 근령 씨와 신 교수의 결혼 소식이 언론에 공개된 바로 다음날 결혼 반대의 심정을 밝혔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신동욱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결혼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며 “우리 집안 사람들이 다 축하하고 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고, 누나에게 장만해 줬다는 집도 7년 전에 마련해준 것으로 이번 결혼과 무관하다”고 말해 근령 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근령 씨와 네 살 터울인 박 회장은 어릴 때 어머니 역할을 했던 박 전 대표보다 바로 손 위 누나인 근령 씨와 더욱 가깝게 지냈다.

박 회장은 1997년 한 시사 월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둘째누나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적이 있다. “저는 큰누나 작은누나 다 좋아해요. 작은누나는 어린이회관을 맡고 있는데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옛날에는 나오던 보조금도 시에서 안 나오니까요.” 근령 씨 역시 박 회장이 구속될 때마다 법정까지 쫓아가 눈물을 보이며 안타까워하고는 했다.

“‘가상의 신동욱’ 불신”

“지만이는 청와대를 나와 항상 사업을 하고 싶어했어요. 친구들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요. 결국 지금 자기 사업을 하고 있으니 꿈을 이룬 셈이죠. 어릴 때는 돈만 생기면 책을 사고 기계를 분리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을 참 좋아했죠. 예전에 동생 집에 가보면 기발한 것들을 만들어 전시해놓고는 했죠. 지만이는 아마 육사에 안 갔다면 공대에 갔을 것입니다. 친구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기타 치는 것도 좋아했어요. 자유분방한 성격에 한때 방황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아이 낳고 잘살고 있으니 누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죠. 부모님들이 이 모습을 보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울먹)

이렇게 각별했던 남매가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최근 박 회장은 지인을 통해 둘째누나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인에 따르면 “2006년 신동욱 교수와 약혼 발표 후 둘째누나에 대한 신임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며 “특히 큰누나의 심기가 불편한 줄 알면서도 지난 총선 때 충북선대위원장으로 나가는 등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둘째누나를 싫어한다기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신 교수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둘의 결혼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참한다는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터뷰 내내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신동욱 교수가 입을 열었다. 박 회장의 결혼 불참 발언에 대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신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진짜 억울한 것은 박근혜 전 대표나 박지만 회장이 저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저를 불신하신다는 겁니다. 일부 언론에 나온 내용이나 측근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신동욱’을 무조건 불신한다는 거죠. 박 회장의 5촌 조카가 저에게 박 회장이 전하라고 했다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남녀지간 문제는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걸 알았다. 여전히 두 사람이 좋아한다면 남녀 간 만남은 인정하겠다. 단, 공식석상에는 나타나지 말라’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불과 1년도 안 된 시점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결혼식에 불참하겠다니 박 회장보다 측근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박 회장이 5촌 조카에게 이 말을 했다는 시기는 지난해 12월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박근혜 전 대표가 두 사람의 결혼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했던 시기도 이 때쯤이었다. 역시 근령 씨의 충북공동선대위원장 출마가 3남매 간의 앙금을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이사장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3남매가 성북동 집에 함께 살던 때를 꼽았다.

1979년 박 대통령의 사망으로 청와대를 떠나게 된 3남매는 거의 무일푼으로 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특별히 모아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신당동 사저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언젠가 대통령 그만두고 돌아갈 때를 생각해 팔지 않고 있던 곳으로, 동생 지만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대지 347m2(105평)의 이 집은 한국은행 관사로 이용되던 것을 박 전 대통령이 1955년쯤 구입했다.

박정희 일가는 국가재건회의 의장 공관으로 들어간 1962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3남매는 청와대를 나와 이 신당동 집에 둥지를 마련했지만 얼마 후 성북동 집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부모님이 쓰시던 이부자리며 유품을 신당동 집이 너무 작아 친지분들에게 나눠 보관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 친척집의 형편도 좋지 않아 유품을 제대로 보관할 수 없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지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성북동으로 넓혀갔죠.

“3남매가 모여 살던 성북동 시절 그리워”

당시 지만이가 장교로 집에서 출퇴근할 때였는데 언니는 아침마다 손수 지만이에게 콩나물국·시금치국을 끓여주셨어요. 지만이는 새벽부터 일어나 언니가 수고롭게 끓여준 국을 반도 못 먹고 나갔죠. 항상 아침에는 그렇게 시간에 쫓겨 다니더라고요. 이후 지만이가 ‘사업을 해서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성북동 집을 팔아 동생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언니와 저는 장충동 집으로 좁혀 나왔습니다.”

근령 씨는 미국으로 가기 전 장충동에서 언니와 둘이 살 때 쌓은 자매의 정을 잊지 못했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진 언니를 대신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시절이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언니의 콘텍트렌즈도 제가 맞춰왔죠. 언니는 항상 신문을 보며 메모해 놓았다 제게 책을 주문하셨어요. 한번은 규장각의 <격암유록>이라는 책이 보고 싶다고 해서 구해다 드린 적도 있어요.”

다른 평범한 가정의 자매들처럼 투정부리고 언니와 함께 미장원에 가지 못해 속상한 적도 많았다는 근령 씨. 그는 언니가 보여준 마음만은 잊지 않고 있다. “제가 심장이 약한 것을 아는 언니가 한번은 해외에 초청받아 다녀오시면서 ‘구심’이라는 심장약을 사다 주셨어요. 저도 외국에 다녀올 때 언니에게 에나멜로 된 주름 잡힌 가방을 사다 드렸는데 언니가 몇 년간 그 가방을 들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박근혜 전 대표는 부모를 잇달아 비명에 잃은, 하늘이 무너진 슬픔을 겪은 사람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권력무상’도 경험했다. 치열한 경선을 거치며 “나는 더 잃을 것도 더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2002년 부모의 적이었던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도 화해와 용서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던가?

“북한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어머니가 북의 사주를 받은 총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기습하기 위해 북에서 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왔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을 보아왔다. 그런 내가 북한에 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과거의 아픔과 기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전 대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움직인다> 중에서)

‘적과의 동침’도 무릅쓰던 박 전 대표에게 동생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한낱 먼지 같은 무상함일 수 있다. 아직도 못 이룬 박정희가(家) 3남매의 화해가 아쉽다.


[박지만 EG 회장 전화 인터뷰]
"근령 누나의 판단력 믿을 수 없다"

박근령 씨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은 둘째누나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근령 씨의 결혼 발표가 보도된 직후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가족은 이 결혼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정을 공개했다.

근령 씨의 결혼을 3일 앞두었던 지난 10월10일. 일부 언론에 또다시 ‘박근혜 전 대표가 동생 근령 씨 결혼에 불참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동생 박지만 회장도 불참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기사가 보도된 당일 <월간중앙>은 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속내를 듣고 싶었지만 박 회장은 언론과의 전화 통화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인터뷰는 짧게 진행됐다. 다음은 박 회장과의 일문일답.

-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누나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나는 지금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근혜누나나 저나 같은 형제인데 왜 도와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꾸 주변의 말에 솔깃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는 어쩔 수 없습니다.”

- 박 회장과 근령 누나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좋았죠. 좋았는데…. 자꾸 딴 이야기를 하시고, 만나면 제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당신 주장만 옳다고 하시니까….”

- 결혼식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으실 것인가요?
“결혼식에는 안 갑니다. 제가 계속 말하면 또 오해가 생길 것이고…. 더 이상 시간도 없고, 이만 끊겠습니다

[육영재단 파문은…]
“법치 국가에서 폭력 강탈은 있을 수 없는 일”

지난 5월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에 대한 이사장승인취소처분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설립자의 자녀들이 모두 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 196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육영재단을 설립했다. 어린이 복지사업을 하려는 목적이었다.

1974년 육 여사 작고 후 육영재단은 크고 작은 분쟁 속에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90년 박근혜 전 대표가 동생 근령 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 직을 물려주고 떠난 이후에도 분규는 끊이지 않았다. 1994년 육영재단 직원들이 근령 씨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육영재단의 관리·감독기관인 서울 성동교육청은 2001년과 2004년 근령 씨에 대한 이사장취임승인을 취소했다.

부실 경영과 감사 거부 등이 이유였다. 이에 근령 씨 측은 불복 소송을 냈으나 3심까지 이어진 재판 끝에 패소했다. 지난 5월15일 내려진 대법원 최종 판결에 따라 근령 씨는 실질적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2006년 12월 근령 씨와 신동욱 교수의 약혼 사실이 알려지면서 육영재단의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사무국장과 일부 직원들이 이사장인 근령 씨와 당시 육영재단 감사실장으로 있던 신 교수의 퇴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8일에는 근령 씨의 퇴진을 요구하는 직원들이 어린이회관을 점거하면서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근령 씨와 신 교수는 이 폭력사태로 육영재단에서 나오게 됐다. 현재 서울 광진경찰서에는 육영재단과 관련한 고소·고발 및 진정 사건이 20여 건 넘게 접수돼 있다. 근령 씨는 현재 후임 이사가 선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등기부상 이사 권한은 유지하고 있다.

그는 “법치국가에서 폭력 강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등기부상 이사의 권한이 살아있기 때문에 재단 업무 수행권을 복원하고 권리를 찾을 법적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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