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家 진실을 말하다 - “근혜 언니와 갈라선 18년, 통곡의 ‘짝사랑 세월’ 보냈다”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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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추석이나 설에도 이들 3남매가 모두 모이는 일은 드물다. 박 전 대표는 미니홈피에 2005년 9월 동생 지만 회장의 득남 소식에 기뻐하며 조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근령 씨와는 왕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5일 육영수 여사 34주기 추모식 때 근혜·근령 자매가 모처럼 정답게 웃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지난번 어머님 추모식 때 자매 간에 다정하게 웃던 모습이 공개됐는데 공식적인 자리가 끝나면 따로 만나시나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공식적인 자리 외에 집에서 안 만난 지 오래 됐어요.”

- 동생 박지만 회장이 득남했을 때 조카를 보러 가셨을 텐데요?
“언니와 제가 따로 갔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

- 박 전 대표의 조카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더라고요.
“조카와 잘 지내고 싶어도…. 그 말 못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는 손주를 한번 안아보시지도 못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요. (침묵) 저도 마찬가지인데 언니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2006년 12월 근령 씨와 신 교수의 약혼 사실이 알려지자 박 전 대표는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지만 회장도 “누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둘의 결혼은 가족들의 반대로 약혼 발표 후 1년이 넘도록 진행되지 못했다. 박 전 대표의 측근은 “박 전 대표는 한동안 ‘부모 자식도 못 말리는 사랑을 형제가 어떻게 하겠느냐’며 잠시 받아들일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혼 후 혼자 된 동생이 누구를 만나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언니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겠느냐는 것. 자매 간 화해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던 그 즈음. 다시 둘 사이의 불화를 심화하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지난 4월 총선 때 근령 씨가 오장세 위원장과 함께 한나라당의 충북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나선 것. 대선 후 친(親)박근혜계를 챙기지 않았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대립구도는 조조와 유비의 적벽대전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런 마당에 치러진 4월 총선에서 친동생이 언니에게 칼날을 세운 격이었다.

- 언니를 그렇게 위하면서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 충북공동선대위원장에는 왜 나선 것입니까?
“그걸 나쁘게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그때 언니에게 사전에 말씀 드리려고 연락했는데 답이 없으셨어요. 언니도 어차피 한나라당을 위해 뛰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동생 입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선거 때 미국에서도 가족이 다 나섰잖아요? 한나라당에서 제게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고, 언니도 결국 한나라당이 잘되기를 바라실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과반의석 확보에 성공하며 거대야당으로 거듭난 한나라당이 충북에서 완패한 것. 8개 선거구 가운데 통합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제천-단양 한 곳에서만 승리한 초라한 성적표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이 선택한 ‘근령 카드’가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꼼수’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부 한나라당 친박 후보들은 근령 씨의 지원유세를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충북지부가 근령 씨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 오히려 충북에서 만만찮은 세를 유지하고 있던 박 전 대표 지지층 이탈을 가속화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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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없는 언니 박근혜”

“친박근혜니, 친이명박이니 한나라당 경선 내내 이런 말이 돌았잖아요? 제가 언니 마음을 대신한다는 것은 외람되지만…. 일단 경선이 끝난 후 언니는 아름답게 승복했다고 믿었습니다. 일단 경선을 거쳐 한 사람이 당선됐다면 당을 위하는 길로 나가야 하는 거죠. 결국 총선이 끝난 후 친박계 인사들도 당에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한나라당은 총선 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저희 외가인 충북에 저를 앉혔던 것 아닙니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저는 지금도 잘못했다고 보지 않아요.”

근령 씨는 주변의 평가가 어떻든 언니가 속한 한나라당을 돕는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 때 외국을 오가는 박 전 대표를 마중하러 인천공항에 꽃다발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언니에 대한 애정의 제스처를 보였지만 언니 박근혜는 수년째 대답이 없다. 언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얼마 전 아시는 분이 언니가 나오신 모임에 동석했는데 아마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저와 관련한 안 좋은 말을 꺼내셨나 봐요. 그런데 언니가 ‘동생 얘기는 그만하시지요’라고 하셨대요. 남들이 자꾸 언니와 저의 불화, 앙금이라는 말씀을 하는데 듣기 안 좋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데 우리가 다툴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변 분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오래전 언니가 어느 글을 통해 ‘천륜’(天倫)이라는 말을 쓰셨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언니의 표현이 이해되더라고요. 자매 간의 정은 누구도 끊지 못합니다.”

박 전 대표에게 근령 씨가 믿는 ‘천륜’의 정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지난해 7월 펴낸 박 전 대표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움직인다>에는 동생 근령 씨에 대한 애틋함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근영이는(근령 씨는 이름을 세 번 바꿨다. 근영→서영→근령) 예술감각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이 있었다. 나는 첫째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면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근영이는 좀더 창조적인 아이였고, 그만큼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근영이는 제약과 통제가 따르는 청와대생활을 3남매 중 가장 많이 답답해 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때 맏이로서 지켜본 동생 근령에 대한 당시 심정도 묘사됐다. “근영이의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야무지고 강단있어 보여도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였다. 나는 가만히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는 동생들을 품에 힘주어 안았다.”

“[TV문학관] 보며 훌쩍거리며 울던 근혜 언니”

박 전 대표는 자서전에 근령 씨를 ‘여리고 감성적인 아이’ ‘예술감각이 뛰어난 창조적인 아이’로 표현했다. 동생이 보는 언니 박근혜가 궁금했다.<<계속>>

박미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월간중앙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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