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첫 무대서 진땀 흘린 이태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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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경력 8년 만에 첫 연극무대에 선 이태란은 "‘스타’라는 자존심을 버려야 연기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서울 대학로 창조홀에서 윌리 러셀작의 연극 '리타 길들이기'의 막이 올랐다. 대학 교수인 프랭크와 미용사 리타가 서로를 길들이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유명한 코미디다. 1991년 1대 리타를 최화정이, 97년 2대 리타는 전도연이 맡았다. 그리고 탤런트 이태란이 세 번째 리타를 맡아 무대에 올랐다.

막이 올랐다. 상대역을 맡은 신철진과 대사를 주고 받던 이태란의 말문이 갑자기 막혔다. 객석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태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리고 "아! 어떡하지?"라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내뱉은 말은 대사가 아니었다. 실제 상황이었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당황한 그는 "죄송합니다"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신철진이 다시 대사를 던졌지만 대꾸가 없었다. 머릿속이 까맣게 타버린 듯했다. 이태란의 어깨 뒤로 성큼성큼 걸어간 신철진은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이태란은 그제서야 대사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2막으로 접어들고서야 그는 페이스를 찾아갔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와 딱딱하던 목소리도 서서히 풀렸다.

막이 내린 뒤 이태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관객에게 사과를 했다. "욕심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좀더 겸손하게 하겠습니다." 관객들은 아유하는 대신 격려의 박수를 쳤다.

무대 뒤로 가서 이태란을 만났다. 생애 첫 무대라고 했다. "지난 8년간 TV드라마를 찍었지만 '진짜 연기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며 "대학로에서 연극을 볼 때마다 진짜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TV연기자에게 연극무대는 벌거벗고 관객 앞에 서는 일이나 다름없다. 'NG'라는 방패막이도 없다. 더구나 전 매니저를 고발하면서 불거진 스캔들로 연기 생명까지 위협받았던 이태란이다. 혹 있을지 모를 곱지 않은 관객의 시선도 그에겐 버거웠을 것이다.

요즘은 연극판 출신 스타급 배우들도 대부분 연극을 외면한다. 그러나 이태란은 "당장 돈이 되는 스케줄을 잡는 것보다 제대로 된 연기를 익히는 게 절실하다"며 소속 매니지먼트사를 설득했다. 강행군하는 TV촬영 일정 틈틈이 연극 연습에 매달렸다.

발성이 모자라고 몸도 굳어보였지만 관객들은 이태란의 '용기'를 칭찬했다. 마침 이 날은 이태란의 생일이었다. 관객이 빠져나간 텅 빈 무대에서 케이크를 받아든 그는 "고통스러운 수업료를 치렀지만 실력 있는 연기자로 거듭나려는 첫날로 여기겠다"며 "매년 한편씩은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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