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단계 넘어 투매로 … 종착역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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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28면

세계 최대 다국적 비료회사인 모자이크의 별명은 ‘헤지펀드 애완견’이다. 돈이 넘쳐나던 시절 헤지펀드들의 사랑(집중 매집)을 듬뿍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쌀과 밀값이 오르자 농민들이 놀리고 있던 땅을 다시 일구면서 비료 수요가 급증했다. 모자이크의 1분기 순이익이 1년 전보다 무려 12배 늘어났다. 눈치 빠른 헤지펀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 회사 주식을 매집했다. 주가는 사상 최대치인 120달러까지 치솟았다.

위기의 진앙 미국 증시는

그러나 지난 7월 이후 상품 거품이 붕괴했다. 모자이크의 주가도 17일 30달러 언저리로 4분의 1 토막이 났다. 헤지펀드들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주가 폭락을 억제하기 위해 공매도가 금지됐다. 헤지펀드들이 주식이나 상품에서 본 손실을 벌충할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헤지펀드의 돈줄인 은행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주가 하락과 공매도 금지, 자금난으로 앞뒤가 꽉 막힌 헤지펀드에 대출금 회수 요구가 빗발쳤다. 일반투자자들도 환매를 서둘렀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헤지펀드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단 하나, 보유 주식 처분이었다. 헤지펀드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들어올 환매 요구까지 감안해 주식을 처분하고 있다. 거대한 악순환이다. 뮤추얼펀드라고 다를 게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는 최근 글로벌 주가 폭락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집값 거품 붕괴→신용경색→주가 급락→금융회사 파산→경기침체→원유 등 상품 수요 감소→상품 거품 붕괴→주가 폭락’으로 이어지는 ‘복합적 거품 해소 과정’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항복(투매)’단계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미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거품 붕괴 모델(위 그래픽)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일본·한국 증시는 ‘공포(Fear)’ 단계를 지나 ‘항복(Capitulation)’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분석된다. 각국 정부가 전례 없는 기법과 규모로 구제금융을 쏟아 붓고 있지만 시장 참여자들은 작은 악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보유 주식과 자산을 내던지고 있다.

특히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계기로 글로벌 금융 패닉이 본격화한 지난 9월 이후 하락 추세가 가파르다. 꼭 1년 전 버블 붕괴가 시작된 시점부터 따지면 현재 미 주가의 하락은 20세기 최악이었던 1929년 대공황보다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아래 그래프). 지난해 8월 이후 1년여 동안의 하락률은 최고치 대비 40%에 육박한다.
투매는 주식뿐 아니라 원유와 상품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일부 뮤추얼펀드, 투자은행들이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사들였던 물량을 시장에 경쟁적으로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펀드는 환매 요구, 투자은행들은 자금난을 돌파하기 위한 현찰 마련이 목적이다. 7월 초 정점과 견주면 원유는 50%, 다른 상품은 40% 이상 값이 떨어졌다.

다음 단계는‘좌절’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심연에 빠져 있던 32년 6월 8일 다우지수는 41.22포인트였다. 버블의 정점이었던 29년 8월보다 89% 추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설립자인 찰스 다우가 1896년 5월 다우지수를 처음 만들 때(40.94)로 돌아간 것이다. 32년 지수를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1896년 이후 36년 동안 미국 경제와 기업들이 달성한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민스키는 이런 국면을 ‘좌절(Despair)’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시기에 주가 등의 자산 가격은 장기 평균치는 물론 합리적 적정가치 아래를 맴돈다. 돈은 국채 등 조금이라도 안전한 자산으로만 몰려든다. 32년 미 재무부 채권 시세는 액면 금액을 추월했다.

이번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월스트리트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대공황 때처럼 실물경제가 망가지고 주가가 폭락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극심한 공황이 발생하고 주가가 폭락한 이면에는 거품 붕괴의 충격 외에도 미 중앙은행의 무능(부적절한 금리인상)과 각국의 보호무역 정책에 따른 교역량 급감 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버블 붕괴라는 하나의 요인만으론 그 지경까지 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금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위기 대응 능력이 의심받고 있기는 하지만 대공황 때처럼 금리를 올리는 우둔한 짓은 하지 않고 있다. 각국 정부도 비교적 신속하게 개입해 금융 패닉을 무마하고 있다. 또 서방 선진 7개국(G7) 등이 앞장서 나름대로 공조를 취하고 있다. 모든 피해를 이웃 나라에 전가하는 보호무역 정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달리 말하면 대공황을 일으킨 요인 가운데 정책 실패는 발생하지 않고 버블 붕괴라는 요인만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우지수의 마지노선은 어디일까. 월스트리트 투자전략가들은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섣불리 예측했다가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일부는 “다우지수가 추락해도 최악의 경우 7500 선에서는 멈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닷컴 거품 붕괴와 9·11 테러 직후인 2002년 10월 9일치(7286. 27)를 기준으로 추정한 것이다. 다우지수가 이 정도까지 무너진다면 그때부터 5년여 동안 성장한 미 경제와 기업 가치 등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셈법이다. 2002년 이후 발생한 유동성과 주택 거품의 모든 흔적이 사라지는 수준이기도 하다.

앞서 움직이는 투자자들
지난 주말 다우지수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8852.22를 기록했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이 말하는 최악의 저점과 비교해 아직 1300포인트 정도 높은 수준이다. 현재 타고 있는 뇌관도 여전하다. 이런 돌발 변수가 발생하면 며칠 또는 몇 주 만에 저점에 다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악의 저점이 실제 올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미 주식의 가치는 적정 수준 아래로 밀려 있는 상황이고, 지금의 주가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공포와 좌절 등 인간 심리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명한 투자자’의 선도그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점을 예측하고 기다리기보다 지금부터 주식을 사들이겠다는 게 ‘현명한 투자자’들의 접근법이다. 워런 버핏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현금자산이 풍부하고 ▶시장 점유율이 높으며 ▶경영이 건실할 뿐만 아니라 ▶빚이 적은 기업의 주식을 주로 사들이고 있다.
 
‘분쇄 과정’과의 마지막 싸움
물론 그들도 단기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챙길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다우지수가 저점 수준에서 상당 기간 수평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과정을 ‘분쇄(Grinding)’ 과정이라고 부른다. 시장 참여자의 인내심과 체력을 맷돌로 갈듯이 고갈시킨다는 의미다. 주가 폭락의 여파로 기업과 가계의 재무 상태가 만신창이가 돼 실물경제가 극도의 침체 양상을 보인다. 실업자가 늘어 소비가 금감하면서 주요 기업이 위태롭다거나 파산했다는 소식이 잇따른다. 간혹 반등을 모색한 주가는 힘없이 내려앉기를 되풀이한다.

대공황 때 분쇄 과정은 20개월 이상 진행됐다. 이번 분쇄 과정이 얼마나 갈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기업 재고가 과거 대공황 때보다 훨씬 적고, 주택을 제외한 시장 참여자들의 자산이 유동화돼 있어 쉽게 처분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 요인이다. 부실을 빨리 떨어내 몸을 추스르기 쉽다는 얘기다. 주가 회복은 그만큼 빨라질 수 있다. 증시의 오랜 격언인 ‘공포가 지배할 때가 반등의 출발점’이라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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