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분노와 자긍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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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런 얘기를 써도 될까 싶어 참았던 기사가 한 외국신문에 소개돼 난감했다.내용인즉 북한 무장공비 침투 직전 미국 정보기관은 북한 잠수함의 남진(南進) 사실을 포착하고 있었으나 남북한간 긴장고조를 막기 위해 이를 한국측에 알리지 않 았다는 것이다.기고한 언론인은 「루머」라는 표현을 썼지만 글쓴이 자신은 나름대로 확인한 듯한 기사였다.
필자는 같은 얘기를 무장공비사건과 재미동포 로버트 김씨의 스파이혐의 구속사건 직후 「믿을 수 있는」소식통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당시 필자는 우방 미국이 우리를 대하는 행태와,또 한.미관계를 이토록까지 악화시킨데 대해 누군가 모를 이를 겨냥해분노를 터뜨렸었다.
한편 같은날 외신은 윈스턴 로드 미 국무차관보의 방한소식을 다루며 북한과 미국에 대한 한국민들의 분노를 지적했다.같은 면기사는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심사 통과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국제사회에 비친 한국의 두 얼굴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기사였다.그래도 군사적 긴장 속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된 감격을 앞세우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OECD가입은 지난 18개월간 애써온 정부의 보람인 동시에 선진국 대열에 든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이다.사실 헝가리.터키.멕시코등이 회원국으로 있는 OECD라면 『한국이 왜 이제까지 빠져있었는가』고 묻는 이들도 당연 히 있을 법하지만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은근히 자신을 갖게 되었고 때로는 이러한 자신감이 오만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경제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도 정부의 「허리 졸라매기」호소가 잘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방만해진 우리의 모습이 허상(虛像)이라고 부인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북한의 준동(蠢動)을 겪고서야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라고 법석대면서 북한의 붕괴 운운하며 상대를 얕보고 자만했던 마음가짐도 되돌아 보게 됐다.또한 전례없는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혈맹이라 불러온 미국을 다시 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 었다.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한국은 OECD회원국 가운데경제성장률과 평균 노동시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부지런한 국가다.잘만 활용하면 건강한 경제운용을 촉발할 OECD가입에 일부러라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한 계만 정확히 인식한다면 자긍심은 문제될 것이 없다.
까다로운 상대인 북한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미국을 분노만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점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챙겨보도록 해야할 것이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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