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눈에 보이는 호주, 안 보이는 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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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호주에 간다는 말을 들은 딸아이의 첫 반응은 “아빠, 캥거루 사진 꼭 찍어오세요”였다. 호주산 쇠고기를 먹고, 호주산 와인을 마시고, 호주로 어학연수와 조기 유학을 떠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이들 상상 속의 호주는 여전히 캥거루와 코알라가 사는 ‘동물의 왕국’인 모양이다. 솔직히 호주에 대한 나의 인식이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열 시간 이상을 날아가 직접 보기 전엔 말이다. 역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호주에서 석탄과 철광석을 수입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한국이 수입하는 광물자원의 3분의 1이 호주산이다. 호주가 없으면 세계 굴지의 철강기업인 포스코도 존재할 수 없다. 포스코가 매년 수입하는 4500만t의 철광석 중 2500만t이 호주에서 공급되고 있다. 포스코가 들여오는 연간 2300만t의 유연탄 중 1200만t이 호주산이다. 제철산업의 양대 원료인 철광석과 유연탄에 있어 호주만큼 안정적이고, 믿을 만한 공급원이 없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은 호주에서 54억 달러어치의 광물자원을 수입했다. 원자재값 폭등으로 올해는 거의 두 배가 될 전망이다.

호주는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 기간 동안 1만7000여 명을 파병했고, 그중 339명이 전사했다. 수도 캔버라의 안작 퍼레이드 대로(大路)변에는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있고, 전쟁기념관에는 한국전쟁관이 별도로 있다. 지난 50여 년 사이에 양국 관계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지난해 양국 간 교역규모는 179억 달러로, 한국은 호주의 4대 교역국, 호주는 한국의 6대 교역국이다.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백호주의(白濠主義)’를 버리고, 1970년대부터 아시아 이민을 적극 받아들인 결과 현재 호주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 교민이 살고 있다. 호주에 와 있는 한국 유학생만 2만2000명으로 중국에 이어 둘째다. 또 매년 3만 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 땅을 밟고 있다.

14~15일 이틀간 캔버라에서 제1회 한국·호주 리더십 포럼이 열렸다. 눈에 보이는 양국 관계 못지 않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도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과 호주국립대학이 공동 주최한 이 행사에는 양국 정부와 학계, 재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 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경제적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한국과 호주는 세계 13위와 14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중견 국가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한다는 데 참석자들은 인식을 같이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안보의 축으로 삼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열린 국가라는 공통점도 확인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 포럼이 열린 만큼 참석자들의 관심은 위기에 따른 미국의 리더십 손상이 미국 중심의 아태 질서에 미칠 파장에 집중됐다. 최대 화두는 중국이었다.

참석자들은 미국의 영향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우월적 지위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된다고 보고, 장차 중국으로의 ‘세력 이동(power shift)’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아태 지역의 중견 국가를 대표하는 양국이 협력할 여지가 크다는 데 의견 접근을 보였다. 아태경제협력체(APEC) 창설 과정에서 양국이 이니셔티브를 취했던 것처럼 ‘아태 중견 국가 연합’을 구축하는 데서도 양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주의 뿌리는 영국이고, 지금도 전체 인구의 90%가 유럽계 백인이다. 그럼에도 호주는 아시아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탈아입구(脫亞入歐)’가 20세기 일본의 비전이었다면 ‘탈구입아(脫歐入亞)’는 21세기 호주의 비전이다. 지리적 거리가 먼 만큼 양국 간 전략적 이해는 더욱 긴밀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주의 가치에 눈 돌릴 때가 됐다. <캔버라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